이창호,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와 지도기 통해 '반상 외교'
[바둑계동정]
  • 오로IN|2017-10-11 오후 06:10
▲ 추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왼쪽)와 이창호 9단이 지도대국 후 복기하는 장면.
이창호 9단 오른쪽은 목진석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

‘돌부처’ 이창호 9단이 11일 서울 명동에 자리한 중국대사관을 방문해 추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와 지도기를 두며 반상(盤上) 외교를 펼쳤다.

지난해 한국기원에서 아마5단증을 받을 바 있는 바둑 애호가 추궈홍 대사는 유창혁 한국기원 사무총장과도 한국과 중국의 공동 관심사인 바둑을 주제로 환담을 나눴다.

추 대사는 지난해 아마5단증을 받는 자리에서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도 바둑 애호가”라면서 “바둑이 한ㆍ중 교류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ㆍ중 관계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2014년 2월 주한 중국대사로 공식 부임한 추궈홍 대사는 1957년 상하이(上海)에서 출생해 상하이외국어대학을 졸업한 후 1981년부터 외교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주일본대사관에서 3등 서기관으로 출발해 일본대사관과 오사카총영사관 등을 거쳤다.

추궈홍 대사는 중국 외교부 바둑대회에서 준우승해 중국기원으로부터 아마5단증을 받았고, 외교부 내 바둑 클럽에서 부회장을 맡았을 정도로 바둑에 대한 조예가 깊다.


▲ 유창혁 한국기원 사무총장(왼쪽)과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가 환담을 나누고 있다.



▲ 이창호 9단(왼쪽)이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에 휘호바둑판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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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선생|2017-10-15 오후 10:11:00|동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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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미국 트럼프와 북한 김정은이 이 둘 중 과연 누
가 더 위험할까? 한국 언론에서는 거의 잘 다루지 않고 지나갔지만, 이틀 전 북한 외상 리
영호는 매우 중요한 발언을 했다. 북한은 한미연합군사 훈련 중단과 북한 핵개발 동결을 맞
바꾸치기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발언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 핵
이야기만 나오면, 미국행님 살려주이소 하고 괴성을 지르면서 입에 개거품 문채 뒤로 나
짜빠지는 나이브한 친미 쇼비들은 더욱 더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한다. 북한은 처음부터 미국
이 두려운 것이다. 트럼프 출현 이전부터. 트럼프가 등장한 다음에는 더욱 더 두려운 것이
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했다하나 적어도 현재까지 정확한 지점을 겨누고 타격 가한 것은 아
니다. 어쨌거나 힘을 과시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격용이라기보다 방어용이
라고 봐야 한다. 지난 9월 23일 캄캄한 한밤중 미국이 검은 백조 전략 폭격기 B-1B 편대
를 동해 북한 연안선 쪽으로 띄웠을 때, 북한은 미그기 그림자로 드려내 보이지않았다. 김
정은은 미국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너무도 잘 안다. 찍소리도 못하고 근처 가지도 않았다.
그냥 모르는 척했다. 그런 데에 섯불리 접근했다가 실제 공중전이 벌어질 때, 도래하는 결
과에 대해 두려웠던 것이다. 반면, 트럼프는 전쟁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쟁이 나도
미국 본토가 아니라 한국 한반도에서 날 뿐이다 라는 말을 농처럼 쉽게 하는 인간이다. 까
불지마라 북한과의 전쟁은 내가 맘 먹으면 내가 하는 것이지 국무 장관이 하는 게 아니다라
고 지껄여대는 존재이다. 완존히 깡패 중 천하 없는 깡패이다. 과연 누가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문제는 9.11 이후 미국이 도입한 선제 공격, 방어를 위해 먼저 공격하는 개
념인데,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상대적인 것으로, 미국이 선제 공격을 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북한이 먼저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의 모든 협박성 농담들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이래서 한국 쇼비들이 어리석다하는 것이다. 이 쇼비들은 트럼프 행님만
있으면 튼튼하다고 믿고 협박을 계속해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정작 협박이 반복되다
보면, 이게 상대에 의해 어떻게 해석될 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칸트선생|2017-10-17 오전 8:02: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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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치명적인 문제는, 사드는 한반도 전쟁 상황에서는 실제 사용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인
데 북한 노동 미사일 경우 사거리가 1300 킬로미터이다. 일본이나 괌과 같은 곳을 방어하
는데 유용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좁은 한반도에서 쓸 일이 없어 무용지물이다. 북한이 미
쳐서 정확성이 떨어지게 발사 각도를 고고도로 해서 노동 미사일을 쏘냐? 이런 의미에서
사드의 실제 용도는 심리적 효과, 즉 소위 정치적 플라시보 효과 밖에 없다 보면 된다.

게다가, 방패가 정교해지면 창이 또한 정교해지기 마련이라, 북한이 만일 핵탄두를 소형화
시켜 단거리 미사일에 핵탄두를 싣거나 잠수함에서 발사할 경우 사실상 아무런 대안이 없
다. 요는, 핵전쟁은 첨부터 아예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게 중요하지, 미사일 격추라는
날아오는 총알을 뒤에도 아니고 앞에서 겨냥해서 격추시켜서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신화적
사고는 않는 게 옳다.
칸트선생|2017-10-17 오전 7:53: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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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장비는 기술적으로 미사일 방어용으로 전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앞서 내가 이미
암시하였음에도, 한국 쇼비와 파쇼들은 무슨 사드만 도입하면 북핵 공격으로부터 절대 보
호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아, 몇 자 덧붙인다. 우선, 사드의 가장 큰 문제는 단 한번
도 실전에서 사용된 적이 없어, 유용성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누가 뭐래도 이
런 종류 무기는 실전에서 실효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게다가 록히드마틴 측에서 현재 주장
하는 명중율을 그대로 믿는 미사일 전문가는 미국 내에도 실제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 주
장은 그대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보면 틀림 없다.

아래 인용을 참조할 것/

하지만 군사전문가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비추고 있다. 사드를 개발한 록히드마틴사에서
는 요격률이 90%에 이른다고 하지만 아직 지상에서 발사된 미사일을 요격한 경험이 없다
는 것이다. 북한이 만약 한국에 대해 핵공격을 할 경우 현재로선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최
대 사거리 1300㎞인 노동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스커드미사일(사거리 30
0~800㎞)에 실을 정도의 핵탄두 소형화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보긴 어렵고, 대포동미사일
은 사거리가 1500㎞ 이상이어서 근접지역 공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히드마
틴사에서는 지상에서 발사한 미사일을 사드로 요격한 경험이 없다. 모두 공중에서 발사된
미사일을 대상으로 요격했다.

이를 놓고 미국내에서도 사드 신뢰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내놓고 있다. 지난 3월 마이
클 길모어 미국 국방장관실 소속 미사일운용시험평가국장은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 전략분
과위원회에 제출한 서면 진술서에서 신뢰성 실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사드 시스템 구성
요소들은 지속적이고 꾸준한 신뢰성 향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길모어 국
장은 사드의 요격은 항공기에서 발사한 미사일을 요격한 것으로 지상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대한 요격이 아니기 때문에 신뢰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http://www.asiae.co.
kr/news/view.htm?idxno=2015052317231013204 에서 인용)

시링 청장은 사드 미사일이 13차례 실험해서 13번 다 맞혔다고 했다. 요격 성공률이 10
0%라고 밝혔는데?

시링 청장이 기자회견 때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험했는지 원자료를 제시할 수 있
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비밀이라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냥 믿으라는 얘긴데 말이 안
된다.

13차례 실험이 어떻게 이뤄진 건가?

사드는 실전에서 사용된 적이 없어 비행시험으로 요격능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 미국 미
사일방어청 자료에 따르면 2006년 7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13차례 실험을 했다. 초기에
는 요격 시도 자체가 없었거나, 가상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도상 시험만 했다. 2006년 7월1
2일 처음으로 실제 요격에 성공했다고 하고, 2007년에는 탄두와 추진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단거리 미사일을 요격해 마치 스커드 유형 미사일 요격이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기
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문제가 있다.

왜 그런가?

미사일은 탄두와 추진체로 이뤄진다. 당연히 타격을 입히는 것은 탄두이기 때문에 분리된
탄두를 맞혀야지 추진체가 붙어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성공했다는 전반부 네 번
은 모두 추진체를 맞혔을 가능성이 높다. 요격 미사일의 적외선 센서가 불꽃을 좋아한다.
상대방 미사일에 접근했을 때 탄두를 ‘hit-to-kill’, 즉 맞혀서 폭파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불꽃을 뿜어내는 추진체를 맞혀버린 것이다. 그 뒤 탄두를 목표로 하는 실험이 2008
년 6월부터 시작됐으나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인가?

지상에서 발사된 탄도미사일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C17 수송기에서 떨어뜨린 미사일을 요
격하는 실험을 한 것이다. 록히드마틴 사가 공개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항공기의 뒤꽁무
니로 캡슐이 투하되면 낙하산이 펴지고 일정 고도에서 캡슐이 열리면서 타깃 미사일이 날
아가기 시작한다. 이 타깃 미사일의 좌표점 등 정보가 동영상에 떠 있다. 미사일이 날아가
는 시점부터 레이더를 켜서 추적한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추적해서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가 쏴서 맞힌 것이다. 짜고 친 실험이다. 중요한 것은 사드 시스템 전체의 요격률이지 사드
미사일의 요격률이 아니다. 타깃 미사일이 지상에서 발사되면 레이더가 작동하기 시작하
고 요격 미사일에 요격 관련 정보를 주면 이를 토대로 날아가서 맞히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중요하다. 앞부분을 생략하고 환경을 고정시킨 채 요격 미사일의 요격률만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인가. 가장 최근 실험인 2015년 11월1일에도 그런 수준이었다 (http://www.sisain.c
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6776 에서 인용)

미국 우파 언론 폭스 뉴스 기사 참조할 것 (http://www.foxnews.com/world/2017/09/19/
can-us-military-shoot-down-north-korean-missile.html)
christy|2017-10-14 오후 6:26: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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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랑 이놈이 혼자 잘랐다고 설치는 수구꼬올통 조갑제 인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늙으면 빨리 뒤 저야 되.
reply 원술랑 조갑제 할배가 누구냐? (고개를 가로저으며) 난 모릅네. ㅋㅋ chrtsty 이 놈이 나 보고 조갑제라고 하는 거 보니까 정은이 끄나풀이 확실하다. 그래서 늙으면 빨리 뒈져야 돼.
2017-10-14 오후 6:41:00
reply TS엘리어트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은 스파이라고 봐야죠. 40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철저하 반미 친공주의자! 정말 이상합니다. 당신들의 교란과 3국 활동에 대한민국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김정은 정권 곧 무너집니다.
2017-10-16 오전 10:56:00
저것은|2017-10-14 오후 3:02: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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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슨 음 저 별을 가리키는데 손가락 끝에 티끌을 나무라는 토론이군
수준이 프로 와 아마 같아서 토론이 무의미 하다.
바이크신|2017-10-13 오후 11:14: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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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nnnN
69120745|2017-10-13 오후 10:55: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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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를 막고 핵전쟁을 피할려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 할려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핵전쟁을 피할려고 하면 핵전쟁이 일어날것이고 핵전쟁을 각오하고
싸울 의지가 있으면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을거입니다.
생즉사, 사즉생 이순신 장군의 말슴을 새길 때 입니다.
원술랑|2017-10-13 오후 10:38: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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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질 반미주의자야. 왜 미국의 군대가 ``대한민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지 인내심을 갖고 精讀을 권하는 바이다.

정의

미 군정기, 6.25전쟁기, 그리고 정전협정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개설

주한미군은 해방 이후 미 군정시기부터 한반도에 주둔해 왔다. 미 군정시기에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과에 따라 남한지역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6.25전쟁기에는 유엔의 이름으로 공산군을 격퇴하기 위해 주둔하였고, 정전협정이후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보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해외파견 미군 병력 중 독일에 6만9천 명, 일본에 4만 명에 이어 한국에는 3번째로 많은 2만8천5백 명을 주둔시키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유사시 미 해군의 40%, 공군의 50%, 해병대의 70% 이상의 대규모 증원전력을 전개하도록 계획 훈련함으로써 한반도 안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미군 장병들의 숫자는 무려 10만 여명에 이른다.

내용

미국은 유엔에서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고 유엔임시위원단이 선거 및 정부수립을 감독하며,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모든 외국군을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1947년 중국대륙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야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소극적인 한반도정책은 주한미군 철수로 귀착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감군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인하여 지상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고, 그해 미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건의했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조선경비대의 증강 및 지원에 관한 조치와 동시에 검토되었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전쟁을 방지하도록 안보군(security forces)의 훈련과 장비를 지원하며 경제지원을 확대한다고 결정하는 것이었는데, 미군을 철수시키되 조속한 시일내에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한국을 지원하고 1948년 12월 31일까지 철수를 완료한다는 방침이었다. 일련의 과정이 NSC 8로부터 시작하여 이를 수정한 NSC 8/2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1947년 10월 미 육군부(Department of the Army)는 맥아더와 하지에게 한국군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하지는 그 달 남한에 사령부와 지원부대로 구성된 6개의 사단을 편성하고, 그 무기와 장비는 1년간 미군에 의해서 지원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맥아더는 한국에 국방군(Korean defense force)을 설치하는 것은 유엔 총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는 연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4부조정위원회 실무단의 검토로 넘겨져 사실상 육군부와 공군 관련기관 사이를 선회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간에 남한의 국방군 건설과 관련하여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1948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 의한 ‘조선인민군’의 창설을 전격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8일 미 국무부는 하지 중장에게 동년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도록 한국측과 제반 협정을 체결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정부 수립을 앞두고 남한에서의 경비대 병력을 5만 명 수준으로 증원하고, 미군 철수에 따라 자신들의 무기와 장비를 점차 이양시킨다는 조선경비대 증강계획을 추진했다.

이제 미 국무부는 1948년 말의 주한미군 철수를 기정사실화하고 한국의 경비대를 무장하고 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주한미군은 예정대로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부로 철수를 완료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에 다시 파병되었고, 휴전 후에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1년 후에 발효된 ‘한·미 합의의사록’에 근거하여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현 휴전상태인 정전체제를 관리해왔다. 그러나 ‘닉슨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주한미군에 대한 철수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변천과 현황

미군은 휴전 후 2개의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지상군 및 1개 비행사단으로 구성된 공군과 해군을 한국 내 주둔하기로 했으며, 그 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조속히 국군의 증강을 촉진한다는 방침 하에 1954년 1월 23일, 미군 제40·제45 등 2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1957년 5월 15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한국군현대화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육군의 장비 현대화 및 해·공군의 전력도 강화했다. 그리고 1958년 2월 11일 주한 미군의 현대화계획에 따라 주일 미군의 병력 일부가 한국에 증파되어 제1기갑사단으로 발족했으며, F·100 전천후 전투기 등을 한국에 배치하면서 전력을 보강했다.

1969년 7월 25일 괌(Guam)도에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방위의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 져야 하며, 미국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닉슨독트린’을 선언하였다.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에 따라 주한미군은 휴전 이후 63,000명(실질 주둔병력은 58,000 내외)의 병력을 유지해오다가 1971년 3월 27일 미 제7사단 철수로 20,000명을 감축함으로써 병력은 43,000명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미 제7사단의 철수에 이어 한국에서 미 제2사단을 포함한 미 제1군단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한국정부는 미 제1군단의 계속적인 한국 주둔을 요청하였으며, 그 결과 양국은 1970년 10월 23일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간에 한·미군 병력을 동수로 편성하고 일부 예산을 한국정부에서 부담하기로 합의한 후에 통합군단인 한·미 제1군단(집단)사령부를 1971년 7월 1일 창설하게 되었다. 군단 예하에는 미 제2사단, 한국군 제6군단(제20, 26, 28사단과 제2기갑여단), 제1사단, 제25사단, 제2해병여단이 배속되었다.

주한미군 철수가 불가피하게 된 상황에서도 한국측은 당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전쟁억제에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미국은 한국 정부의 의사를 감안하여 이미 제10차 한·미 안보협의회의의 합의에 따라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에 따른 보완조치로서 국제안보 특별지원법안을 1977년 11월 의회에 제출했다. 이어 1월 19일에는 상하 양원합동회의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주한미지상군의 철수에 대한 대가로 한반도에서 적절한 무력균형이 이루어지도록 보완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4월 6일에는 미 하원군사위소위는 미국의 주력지상 전투부대를 남북한이 정치적 타결을 볼 때까지 한국에 계속 주둔하도록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1978년 내에 주한 지상군 6,000명을 철수시키되 그 대가로 제1, 2진 철수병력이 사용하던 8,000∼9,000만 달러 상당의 장비를 한국군에 이양하는 것 등 6개항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1978년 4월 21일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철수계획에 따른 특별성명을 통해 미국이 대한방위공약을 유지함에 있어 확고한 결의를 재확인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적절한 군사균형과 주한미공군의 증강을 포함한 제반조치를 언급하면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수정했다. 이로써 주한미군의 비전투부대 재배치는 당초 일정대로 수행하되 1978년 철군대상 1개 여단 병력 6,000명을 1개 대대 전투병력 800명과 비전투요원 2,600명 등 3,400명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1개 여단의 2개 대대병력은 1979년 말까지 한국에 잔류하게 되었다.

한편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주한미군이 지위를 규정하기 위한 새로운 협정이 필요하게 되어 1962년 본격적인 주한미군 지위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1966년 7월 ‘한·미 행정협정’이 체결되어 그 이듬해 2월에 발효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2000년 8월부터 본격적인 주한미군 지휘협정 개정협상을 재개하여 그해 12월 28일에 형사재판권, 환경, 노무 관련 조항 등을 포함한 제2차 개정내용에 합의했으며, 2001년 1월 18일 양측은 이 개정안에 서명했다. ‘주한미군 지위협정 개정안’은 절차를 거쳐 2001년 4월 2일 공식 발효되었다.

의의와 평가

현재 주한미군은 2만8천5백 명 정도의 규모이며 다른 교대병력 2만5천여 명이 미 본토에서 한국 관련 문화와 지형 숙지 그리고 각종 훈련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근무를 마친 미군 장병들이 다시 미국과 유럽, 일본에 전출하여 그곳에서 한국에서의 근무경험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매년 10만이 넘는 젊은이들이 한국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6.25전쟁 이후 한국을 다녀간 미군의 전체 규모가 약 700여만 명 규모에 이르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駐韓美軍(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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