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사, 조치훈
[기획/특집]
  • 손종수 (시인, 사이버오로 상무)|2017-10-01 오후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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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 명절 추석을 맞아 조치훈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1945년 광복 당시 2000여 명에 불과하던 국내 바둑인구는 2017년 현재 1000만명에 육박할 만큼 늘었습니다. 한국바둑 역사의 순간순간에 영웅들이 있었고 그중 한명이 열도를 제패했던 조치훈입니다. 1962년 6살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1983년 일본바둑사상 처음으로 3대 타이틀(기성ㆍ명인ㆍ본인방)을 석권하며 이른바 대삼관에 올라 일본 일인자로 군림했던 그를 재조명합니다(월간바둑 10월호 게재된 창간 50주년 특별기획 한국바둑10대사건 시리즈 제8번 <지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사, 조치훈>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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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천재, 바다 건너 열도에 가다
1962년 7월 31일 김포공항. 나이 여섯 살보다 더 앳돼 보이는 꼬마가 고사리 같은 한 손으로는 중년남자의 손을 꼭 붙들고 또 한 손으로는 환송하는 가족에게 손을 흔들며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환송하는 모든 사람들이 꼬마의 성공을 빌었지만 그 중 누구도 몰랐다. 이 가녀린 꼬마가 훗날, 일본 프로바둑 천하를 제패하고 중국, 일본 바둑의 틈새에서 변두리취급을 받던 한국바둑을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가 되리라는 것을.

꼬마의 이름은 조치훈. 꼬마의 손을 붙들고 함께 비행기에 오른 중년남자는 고인이 된 한국 프로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국수였다.

도일(渡日) 직전, 조치훈은 한국기원에서 열린 입단대회에 출전했다. 비록, 입단에는 실패했으나 성인들을 상대로 거둔 4승3패의 기록은 주변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선생도 없이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운 여섯 살짜리 아이가 벌써 프로에 육박하는 실력을 갖췄다더라.” 입단대회를 통해 입증된 조치훈의 천재성은 일본 바둑유학을 급행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라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여섯 살짜리 꼬마에게 바둑선진국 일본에서 바둑을 배워 국위를 선양하겠다거나 한국 프로바둑을 발전시키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고 일본유학을 결심했겠는가.

엄마 품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꼬마의 관심은 온통 ‘일본에 가면 맛있는 과자를 실컷 먹을 수 있고 무엇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차와 땅속을 달리는 열차를 탈 수 있다’는 동화 같은 유혹이었다. 갓 입문한 기타니(木谷)도장의 막내제자로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니 맛있는 과자를 실컷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맞다. 황홀한 꿈이었던 하늘을 날아다니는 열차는 고가전철이었고 땅속을 달리는 열차는 지하철이었음을 곧 알게 됐지만.

▲ “명인을 따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나는 꼬마 조치훈. 조남철 손에 이끌려 비행기트랩을 오르면서 모자를 흔드는 모습이 여섯 살 소년답지 않다. 조치훈은 기타니 도장에서 수학하며 장차 일본바둑의 일인자로 성장한다.


62년 8월 2일 도쿄 산케이홀에서 열린 기타니 바둑도장 100단 돌파 기념식은 13개의 신문사와 통신사가 후원했다는 신문기사가 보인다. 당시 바둑의 인기, 그 중에서도 황금기를 구가했던 일본바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조치훈은 이 기념식에서 당시, 일본 프로바둑의 최고유망주로 꼽히던 대만출신 린하이펑(林海峯) 六단과 5점 접바둑을 뒀다.

“여러분, 이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바둑을 뒀다고 해도 아직 7년이 안 됩니다.”

사회자는, 일본바둑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구의 프로와 당당히 마주앉은 꼬마를 한껏 추켜세웠고 팔짱을 낀 꼬마의 오만한 자세는 사회자의 너스레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어린 천재의 치기어린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5점을 접혔어도 어쨌든 프로 최고유망주를 이긴 꼬마는 의기양양했으나 멀지 않은 훗날, 알게 됐다. 그 승리는, 바다를 건너온 꿈나무의 희망을 가상하게 여긴 린하이펑의 중후한 인품을 입증하는 결과였지 자신의 실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조치훈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기사가 린하이펑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조치훈은, 그 이후 린하이펑과 엇비슷한 기량을 가진 기타니 바둑도장의 동문사형 중 ‘대마킬러’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진 가토 마사오(加藤正夫)와 숱하게 많은 연습바둑을 두었는데 비록, 패배의 감정이 뒤범벅된 결과라고는 해도 툭하면 9점까지 접히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최연소 입단, 그러나 늦은(?) 신기록
조치훈이 프로입단을 꿈꾸고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의 기타니 바둑도장 수업시절 곳곳의 행적에서 드러난다. 재능은 타고났으나 프로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 머리는 비상했지만 여느 아이들처럼 어른들의 관심과 칭찬에 우쭐거리는 철부지였다.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도 프로가 된 형(조상연 七단, 일본기원 은퇴)을 따라다니며, 이를테면 다방 같은 곳에서 여기저기 부착된 광고며 상표의 글을 읽어(어디에서나 어른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어머, 얘 좀 봐. 벌써 한글을 깨우쳤네. 아이고, 귀여워라!”

그렇게 주변의 눈길을 끌고 맛있는 걸 얻어먹는 재미가 좋았고 프로기사라는 직업을 가진 형의 사진과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게 신기했다. 어떻게 하면 나도 형처럼 될 수 있지?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바둑이 있었을 뿐이다.

조치훈의 일본유학은 집안의 장남이었던 조상연의 의지였다. 조상연은 부산의 바둑천재로 이름을 날리다가 곧 높은 벽과 마주하게 된다. 숙부 조남철 국수 그리고 또래이면서 한발 앞서 간 김인이다.

최고의 프로를 꿈꾸었던 조상연은 벽을 넘어서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최고의 승부사였고 한국인에게 우호적이었던 거장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九단의 문하로 들어섰으나 곧 그 안에서 공부하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고 좌절했다. 대기(大器)의 틀을 새로 짜기에는 열아홉의 나이가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늦었다는 각성 뒤로 자연스럽게 막내 치훈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것이 프로기사 조치훈의 운명을 꿰는 첫 단추가 된 셈인데 장남과 막내의 생각에는 그만큼 아득한 거리가 있었다.

기타니 바둑도장 입문초기의 조치훈은 바둑공부보다 어른들이 사준 장난감 쌍권총을 차고 카우보이 놀이하는 걸 더 좋아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기타니 선생마저 이 어린 제자를 방임했으니 장난꾸러기의 바둑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기타니 선생은 조치훈의 입단을 열 살로 정한 뒤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치훈의 재능에 도장 수업 4년이면 입단은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는데 그건 노력이라는 절대의 전제를 간과한 오판이었다. 조치훈은 관심과 사랑 속에 부풀었던 ‘열 살 프로 입단’에 당연히(?) 실패했는데 갑자기 싸늘해진 주변의 눈길에 당황했다. ‘천재라더니 별게 없잖아. 열 살은커녕 제대로 입단이나 하겠어?’라는 비아냥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나이는 넷이나 많지만 입문이 늦고 그 입문 시험기 때 조치훈에게 2점을 접히고도 졌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가 먼저 입단의 관문을 돌파한 일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고 한다. 고바야시는, 입문 시험기 때 패배를 안겨주고 ‘야, 바둑을 그렇게 둬서는 (입단은)어림도 없어’라고 놀린 상대였는데 이제는 얼굴 마주칠 때마다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붙이며 깍듯하게 예를 갖춰야 하는 프로가 됐기 때문이다.

이듬해, 조치훈은 입단대회 2위의 성적으로 프로의 관문을 통과했다. 일본기원 설립 이후 최연소 입단(11년 8개월)이었으나 기대치보다 1년 늦은 신기록이었다. 아마도 조치훈은 최연소 입단이라는 신기록보다 더 이상 고바야시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 되었다는 게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비슷한 고백이 전해지는 걸 보면 고바야시의 입단은 조치훈의 프로 입단을 위한 최고의 채찍질이었던 것 같다.

안에서 살기가 힘들었다
기타니 바둑도장의 엄격한 내제자 규율은 프로입단부터 조금씩 자유의 폭이 넓어져 고단자(五단 이상)가 되면 도장을 떠나 독립하게 된다. 조치훈도 五단이 되면서 나카노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했다. 69년부터 73년까지 승단대회 33연승의 대기록을 세우고 74년 신예토너먼트전 우승, 75년 프로십걸전 우승을 거머쥐면서 절정에 이른 조치훈은 드디어 당대 최고의 승부사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九단과 일본기원선수권전에서 격돌했다.

사카다는 ‘면돗날’이란 별칭을 얻을 만큼 날카로운 기풍으로 7관왕의 전성기를 구가한 거장. 치열한 실리 기풍이라는 점에서 사카다와 조치훈은 유사했다. 두 기사 모두 3•三을 좋아해, 사카다는 부채에 즐겨 쓰는 휘호가 ‘찬찬(燦燦-일본어 발음이 삼삼과 비슷)’, 조치훈은 3•三 포석을 즐겨 구사해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일 양국의 신문이 한판, 한판의 결과를 대서특필할 만큼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이 5번승부는 조치훈의 비극으로 끝났다. 사카다를 연승으로 밀어붙이다가 3국부터 내리 무너져 2승3패로 역전패하면서 타이틀획득에 실패한 것이다.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 조치훈은 유독 정상의 무대에서 연승, 연패로 급변하는 드라마틱한 승부를 많이 펼쳤고 그 때문에 ‘화염의 바둑’이란 강렬한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일본기원선수권전에서 거장과 격돌해 참담한 패퇴의 아픔을 맛본 조치훈은 무저갱 같은 침체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좌절이 연애와 결혼의 기폭제가 된 것은 천운일까? 여섯 살 연상 교코 씨와의 뜨뜻미지근했던 연애는 이때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2년 뒤 결혼에 성공했다.

아무튼 그즈음 ‘조치훈의 밀착취재’ 청탁으로 나카노의 아파트를 찾았던 논픽션작가 사와키 고타로(澤木耕太郞)의 말은, 정상을 향한 조치훈의 집념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 “그를 처음 만나고 난 1개월 뒤, 나는 다시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잠시 잡담을 하고 난 다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조치훈이라는 인물에 대해 쓰고 싶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가 입을 열어 한 답변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기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다리라고요?”
“네.”

“기다린다면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내가 잠시 당황하면서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농담 같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조금은 익살스럽게 물었다. 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라고. 그러자 그가 내뱉듯이 말했다.

“떠들어버리면 엷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엷어진다는 것은 바둑세계의 독특한 용어 같았다. 떠들어 버리면 엷어진다.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한마디라도 입에 담으면 한꺼번에 넘쳐버릴 것 같은 뜨거운 생각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것을 떠들어버리면 엷어진다고 표현한 것은 아닐까.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명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명인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완고하며 부러지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알았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거의 ‘그에 대해 쓰는 것을 포기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조치훈에 관한 뉴스는 그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귀에 들어왔다. 1976년 명인전 본선리그에 진입. 그러나 도전자가 되기는커녕 시드잔류도 못하고 함락. 동년에 손에 넣은 왕좌 타이틀도 익년에 빼앗겨 버렸다. 내가 그를 만난 후 2, 3년은 그에게 있어서 문자 그대로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 세월 같았다.

-사와키 고타로, 「마차는 달린다」중에서 발췌


떠들어버리면 엷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지만 내 가슴 속에는 명인에 대한 열망이 들끓고 있다. 나이 열여덟에 이렇게 진중한 신념을 가슴에 담고 그런 의지를 표현할 줄 아는 프로가 이 땅에 존재할까. 있다면 나도 기꺼이 사와키 고타로가 되고 싶다(이런 프로의식을 길러주는 일본바둑의 토양이 부럽다는 얘기다).

79년 조치훈은 드디어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공식기전 서열7위 기성(碁聖)전에서 예선부터 도전기까지 12연승의 기록을 세우면서 오타케 히데오를 스트레이트로 물리치고 타이틀홀더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오타케가 가지고 있던 명인에 도전했고 4승1패1무로 타이틀을 획득하며 이시다 요시오, 린하이펑에 이어 스물넷의 젊은 명인이 되었다.

▲ 조치훈(당시 八단)이 1980년 제14기 일본 명인전에서 오타케 히데오 九단을 4대1(1무)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이후 1983년 일본바둑사상 처음으로 3대 타이틀(기성•명인•본인방)을 석권, 이른바 대삼관에 올라 일본 일인자로 군림했다.


명인에 오른 조치훈은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가속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81년에는 다케미야로부터 본인방을 빼앗으며(4승2패) 사상 네 번째 명인-본인방을 기록했고 82년 오타케가 가지고 있던 십단마저 빼앗으며 사상최초의 「명인-본인방-십단」이 되었고 83년에는 일본 프로바둑의 최정점에 서있던 ‘괴물’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마저 넘어버렸다.

개막식 전야제 무대에 오른 1인자(후지사와)는 젊은 도전자를 향해 딱, 네 판만 가르쳐주겠다고 했고 명인-본인방을 쟁취한 여세를 몰아 기성 도전권까지 거머쥔 도전자(조치훈)는 세 판만 배우겠다고 했는데 승부의 신은 가장 극적인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 ‘네 판 가르쳐 주겠다’(후지사와)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조치훈) 도전기 시작 전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던 제7기 일본 기성전. 3연패 후 4연승의 극적인 드라마를 쓰며 조치훈(왼쪽)이 후지사와 기성의 7연패를 저지하며 우승했다.


기성의 1~3국 3연승, 이대로 끝나는가 싶은 순간 4국부터 도전자의 반격이 시작돼 내리 3연승, 3승3패가 됐고 최종7국마저 도전자가 승리해 ‘슈코 선생의 기성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진다’던 조치훈의 너스레가 예언처럼 적중했다. 일본 프로바둑 사상 첫 대삼관(大三冠-기성, 명인, 본인방) 석권이었다.

그 모든 것은 은인자중(隱忍自重), 절치부심(切齒腐心)의 결과였다. 서로가 잊지 않았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던 조치훈과, 기다리겠다던 사와키 고타로의 은밀한(?) 약속. 그들의 재회가 이루어졌고 몇 차례의 의기투합을 거쳐 85년 제9기 기성전 개막전 서울대국의 동행으로 이어졌다.

85년 1월 16, 17일 이틀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9기 기성전 도전1국은 일본 프로기전 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막을 올린 타이틀전이었다. 조치훈은 도전자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가 펼친 우주 속으로 뛰어들어 악전고투 끝에 이겼다.

대국을 마치고 나온 조치훈은 종국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다케미야가 펼친 중앙세력)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미묘한 말은 곧 언론의 화제가 됐다.

한 신문은 크게 할애한 실명칼럼을 통해 ‘재일 한국인이 일본 땅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다.’는 심정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며 독특한 한일관계, 재일동포들의 불우한 처지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는데 타이틀전 기간 내내 조치훈을 밀착취재한 사와키 고타로는 나중에 이 여정을 정리한 수필집에 전혀 다른 내용을 썼다.

성공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질시의 시선과 공연한 혈육관계 흠집 내기, 조치훈이 일본프로와 대국할 때는 조치훈을 응원하지만 한국프로와 조치훈이 대국할 때는 한국프로가 이겨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라면 어쩔 수 없다. 일본과 한국 어느 쪽에서도 깊숙이 들어서지 못하는 회색지대의 경계인이 조치훈이다.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조치훈 이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대삼관의 절정에서 쓰러지다
이틀걸이 타이틀전에서만 나올 수 있는 3연패 후 4연승은 위대한 프로들이 가진 역류(逆流)의 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드라마다. 지금까지 일본 프로바둑 대삼관에서 작성된 3연패 후 4연승은 모두 다섯 차례. 조치훈은 평생 한 번도 만들기 어렵다는 스릴러를 무려 세 차례나 연출했다. 풍파무쌍(風波無雙)한 승부성향을 웅변해주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공포의 이중허리’란 별명을 가진 린하이펑도 두 차례를 기록했는데 조치훈의 일본 데뷔무대를 함께 장식한 두 사람이 이런 기록(83년 본인방 타이틀전 조치훈 3연승 후 4연패, 타이틀 상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표 참조). 아침에 해가 뜨면 저녁에는 저문다. 달도 차면 기울고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도 있는 법이다. 승부사의 길도 그렇다.

그 징후는 85년 가을에 시작됐다. 가장 일본적인 프로, 치밀한 실리바둑으로 정상을 향해 진군하던 고바야시 고이치가 드디어 명인전 도전무대에 올라 조치훈을 향해 칼을 뽑았다. 기타니 바둑도장 입문시험기 때 2점을 접히고도 패해 네 살이나 어린 조치훈에게 조롱당했던 홋카이도의 시골뜨기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이를 갈아붙이는 노력으로 조치훈보다 한발 앞서 입단하는 근성을 보여주었으나 입단하기가 무섭게 정상으로 뛰어오른 조치훈에게 밀려 존재감조차 미미했는데 어느새 조금씩 다가와 칼집을 내던지고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민 것이다. 조치훈은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을 펼쳤으나 최종 7국에서 명인을 잃었고 생애 처음 3대타이틀 중 하나를 거머쥔 고바야시는 고향 홋카이도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86년 기성전. 다시 고바야시가 도전자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최강자의 상징 대삼관을 연속해서 내줄 수는 없다. 조치훈은 도전기를 앞두고 칩거에 들어갔다. 기성을 방어하고 잃어버린 명인을 되찾아야 한다.

날마다 밤이 이슥하도록 난적의 기보 검토에 몰입했는데 타이틀전을 열흘 앞둔 날 평소처럼 늦은 밤까지 기보를 놓아보다가 시장기를 느껴 단골식당에 야식을 먹으러 나섰다. 집 앞에서 차를 타려고 할 때 도로에서 오토바이 사고가 났고 다친 사람을 부축하려고 다가서던 순간 차량 한 대가 조치훈을 들이받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격통과 함께 몸이 허공으로 뜬다는 걸 느낀 찰나에 의식도 사라졌다.

전치 8주(3개월, 25주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조치훈 걸작선」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된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의 중상. 왼쪽다리는 뼈가 돌출될 정도로 심하게 손상됐고 왼팔도 골절, 그나마 성한 곳이라고는 머리와 오른 팔뿐이었다. 그랬다. 성한 곳은 머리와 오른팔. 그것이 그날의 전설을 만들었다.

조치훈은, 대국불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와 가족,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성 타이틀전을 강행했다. 교통사고는 천재지변이 아니므로 일정연기는 허용할 수 없다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던 요미우리 신문사도 조치훈의 결정을 존중하고 최대한 협조했다. 대국 장소까지 날아갈 전용비행기를 마련해주고 의료팀을 대동시켜 만전을 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의 좌우명(사실, 좌우명도 아니다)이 이때 나온 말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미 몇 해 전 조치훈이 절정을 구가할 때 출간된 수필집 제목이었고 그마저 편집자의 기획이었다.

의식을 찾은 조치훈의 뇌리에 떠오른 최초의 생각은 ‘앞으로도 제대로 바둑을 둘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었다. 속사정을 알고 나면 팬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기성전을 강행한 마음은 목숨을 건 투사의 결의 같은 것이 아니라 프로바둑 전문기사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확인의 불안한 의지였다.

몰아치는 풍랑의 운명을 가진 승부사의 드라마. 전대미문의 휠체어대국은 그렇게 연출됐다. 이 세기의 결전에서 혼신을 다한 조치훈은 타이틀을 잃었으나 두 판을 이겨내 팬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패자였으나 승자 같았다. 조치훈을 상대로 명인에 이어 기성까지 쟁취해 최정상에 우뚝 선 고바야시는, 비운의 영웅을 몰락시킨 효웅이 됐다. 승자였으나 패자 같았다.

위대한 역류(逆流)
조치훈은 존경하는 선배기사로 린하이펑을 꼽으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 프로가 나이 든 프로를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 순류(順流)다. 그런데 린하이펑 선생은 젊은 프로들을 이겨내고 젊은 패자들에게 도전해 타이틀을 쟁취하고 있다. 그 역류(逆流)가 위대한 것이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귀감으로 삼았다면 같은 길을 걷게 되기 마련이다. 조치훈은 생애 최악의 위기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먼 길이지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존경의 대상을 통해 각인된 위대한 역류의 구현이다.

타이틀을 잃었다가 타이틀을 되찾거나 다른 타이틀을 획득하는 일류의 프로는 존재한다. 1인자의 자리에서 밀려났어도 꾸준히 정상을 노크하고 세계타이틀을 쟁취하거나 최고령 타이틀획득의 기록을 세우는 초일류 프로도 있다.

그러나 1인자로서 최정상에 우뚝 섰다가 밀려난 뒤 다시 최정상의 1인자로 복귀한 예는 일본 프로바둑 4백년 아니, 한중일 3국의 프로바둑 역사를 통틀어도 오직 이 한 사람, 조치훈밖에 없다.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조치훈은 최고타이틀 기성을 빼앗긴 뒤 강도 높은 재활훈련에 들어갔다. 바둑은 정신력만의 승부가 아니다. 이틀씩 걸리는 대삼관의 타이틀전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다. 사고 이전까지 즐겼던, 온몸을 격렬하게 사용하는 테니스는 접고 근육의 유연성을 키우는 수영을 시작하며 서서히 정상복귀의 시동을 걸었다.

87년 천원(天元-일본 공식기전서열 5위 타이틀) 쟁취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자신으로부터 기성-명인을 빼앗아 1인자가 된 고바야시의 타이틀을 빼앗았다는 것. 둘째, 천원을 획득하면서 공식 7대 신문기전을 모두 제패하는 첫 번째 기록을 세운 것이다.

89년 봄 십단(十段-일본 공식기전서열 4위 타이틀)을 획득했을 때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슈칸고(週刊碁)」는 ‘조(趙)가 다시 거둬들이기 시작했다’는 만평을 내보내며 영웅의 귀환을 예고했는데 같은 해 여름, 슈칸고의 예고에 호응이라도 하듯 ‘우주류(宇宙流)’ 다케미야를 꺾고 대삼관의 하나인 본인방(本因坊-일본 공식기전서열 3위)을 추가했다.

팬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다시 조-고바야시의 라이벌전으로 쏟아졌는데 대삼관 통합과 1인자의 영예가 걸린 조(본인방)-고바야시(기성, 명인)의 리턴매치는 고바야시가 먼저 선전포고한 본인방 3년전쟁으로 막이 올랐다.

조치훈은 90~92년까지 3년 연속 이어진 이 전쟁에서 최고의 역전드라마를 연출했다. 90년 제45기 본인방전 1승3패 후 최종국 승리 타이틀방어, 91년 제46기 본인방전 2연패 후 4연승 타이틀 방어 그리고 92년 제47기 본인방전에서는 자신의 세 번째 ‘3연패 후 4연승’ 기록으로 타이틀을 방어하면서 3부작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한 것이다.

▲ 1986년 제10기 기성전 도전기를 열흘 앞두고 조치훈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사상 초유의 휠체어 대국이 등장한다. “눈도 보이고 한쪽 손도 멀쩡해 바둑을 둘 수 있다”며 휠체어 대국을 강행한 조치훈의 투혼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둔다’였다.


참패한 고바야시는 “귀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며 고개를 흔들었고 승리한 조치훈은 “이제는 내가 가지러 갈 때”라는 의미심장한 소감을 남겼다.

3년전쟁의 승자 조치훈은 이후 7년이나 더 타이틀을 지켜, 고(故)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九단이 가지고 있던 본인방 9연패(일본프로바둑 최장기간 타이틀방어)의 기록을 갱신하는 금자탑을 세웠는데 그 반환점이 되는 제48기 본인방(타이틀 5기 연패) 취위식(就位式)에서 하객들에게 나누어준 친필휘호 부채에 다음과 같은 포부를 담았다.

군간백일치(君看白日馳) 하이현상전(何異弦上箭)

중국 당대(唐代) 문인 이익의 오언절구에서 발췌한 이 문장은 ‘흐르는 시간은 막 쏘아지려는 화살과 같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반환점을 돌아 본인방 10연패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담담하게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94년 드디어 최정상무대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배역이 바뀐 두 사람. 조치훈으로부터 빼앗은 기성-명인을 움켜쥐고 1인자의 자리를 지켜온 고바야시와 8년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도전자 조치훈.

팬들은 전대미문의 휠체어대국 이후 8년 만에 벌어진 최강자 격돌에 열광했으나 승부는 본인방 3년전쟁에서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귀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며 고개를 저은 고바야시와 ‘이제는 내가 가지러 갈 때’라고 결의를 다진 조치훈의 기세는 그만큼 달랐고 승부도 그 기세대로 이루어졌다. 고바야시는 사력을 다해 선승을 취했으나 이후 3연패로 막판에 몰렸고 다시 한숨 몰아쉰 뒤 1인자의 상징을 잃었다. 8년 만에 기성을 탈환한 조치훈은 기쁨을 크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우승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예전에는 일본의 1인자가 세계의 1인자였으므로 일본 최고의 타이틀 기성 쟁취는 당당한 기쁨이었으나 이제는 일본으로 제한된 1인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인자 복귀 이후 13년이 흐른 지금 조치훈은 1인자가 아니다. 일본의 1인자도 아니고 세계의 1인자는 더더욱 아니다. 이제는 한중 양국의 젊은 패자들이 세계정상을 다투는 시대. 그 어디에도 조치훈의 자리는 없다.

그러나 일본프로바둑 대삼관 기성, 명인, 본인방 타이틀전에서 모두 3연패 후 4연승을 거두고 타이틀 최다연패(본인방 10연패), 타이틀 최다획득(74회, 2위 사카다 64회), 첫 1500승 돌파 등 최근까지 그가 써내려온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기록들은 조치훈이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임을 웅변해준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지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사가 남긴 이 말은 프로바둑 최고의 통찰이다.

▲ 한국현대바둑 70주년을 기념해 2015년 펼쳐진 '조훈현-조치훈 특별대국'은 바둑팬들에게 두고두고 남을 추억을 선사했다.


▲ 2016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본선32강전(더블일리미네이션) 1라운드에서 환갑의 조치훈은 당시 한국랭킹 4위 신진서와 대결했다.


▲ 조치훈은 고국의 대회에서 활동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2017년 그것을 이뤘다. 2017 한국기원총재배 시니어바둑리그에서 그는 KH에너지의 1지명으로서 뛰고 있다. 개인전승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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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무상|2017-10-27 오전 3:37: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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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은 온 정신으로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형 조상연씨가 한국에서 아마추어 강자들의 입단 문을 막자 부산을 중심으로 아마추어 강자들과 함께 기원협회를 만들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60을 넘은 나이에도 바둑에 집중하고 열정적으로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조치훈 밖에 없을 것입니다.
素玄|2017-10-05 오전 9:46: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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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 때문에 독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바둑승부 이야기고
개인적인 느낌은 대단한, 큰 바둑에 걸맞는 훌륭한 인격자이십니다
윤실수|2017-10-02 오후 3:19:00|동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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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이 많은 일본 기전이니 드라마탁 했지 그저 그런 조선 기전이라면...
reply ProblemMe 흄, 친일냄새가 매우풍기는 어투,,,,,,,,,,, 남한에도 엘지배.삼성화제배 3억짜리기전 두개나 있는뎅,,,,
2017-10-03 오전 10:52:00
황소거름|2017-10-02 오후 1:33: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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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자유로운 조치훈 명인
강렬한 혼은 영원하리~
강시콩시|2017-10-02 오전 10:47: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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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독기를 품고 목숨을 걸고 둔다는 젊은 조치훈은 이제 흩트러진 머리칼에 유머스러운 모습의 초로의 신사로 변했습니다. 인생을 알아버린 것일까요 그의 자유로움이 중년의 멋을 느끼게 해줍니다
찌질이頭目|2017-10-01 오후 9:11: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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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나의길이 있었군요? 난 제일교포인줄알았는데...아니였군요,,,차라리 부산으로 오셔서 자리를 잡으시지요??? 그래서 후학을 키운다면 10년후 세계최강의길도 가까울텐데,,,,,,쩝,,,
팔공선달|2017-10-01 오후 9:09:00|동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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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에 대한 일화를 보며 찐한 감동에 다시 한 번 행복해하면서
이제 회한처럼 다가오는 쓸쓸함도 느끼며
고증을 통해 담백하고 진솔하게 피력한 손종수님의 노고에 감사한다.
평생을 바둑과 함께했지만 스타들의 애환을 밝히는 촛불일 뿐이었다.
정용진님과 더불어 같이 한 오로에서의 시간을 감사하며
임들의 열정에 가슴으로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
econ|2017-10-01 오후 8:06: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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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국수는 호적 나이가 일년이나 줄었는데 조치훈 명인은 제대로인 듯! 사진의 소년은 만6세 정도로 보입니다.
대자리|2017-10-01 오후 8:00: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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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연 아니었음 조치훈도 없었네.
조상연이 저승에 가는 장면에서도 사면을 거부한 한국기사들,
아무리 밥그릇이 무서워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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