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해설엔 소리 지르지 않는 샤우팅이 있다
신년대담/ 한준희 축구해설위원 & 박정상바둑해설위원
[기획/특집]
  • 김수광 |2019-01-01 오후 01:12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
  • 카카오스토리
  • 구글+
▲ 한준희 축구해설위원(왼쪽)과 박정상 바둑해설위원.

60년에 한번 돌아온다는 ‘황금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이 밝았습니다. 바둑계도 설레는 마음으로 한해를 시작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사이버오로는 축구해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바둑에 관심이 각별한 한준희 KBS축구해설위원과 바둑계의 대표 해설가 박정상 9단이 나누는 바둑과 축구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기자는 대학시절 자취를 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고 있던 같은 과 동기와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그가 내 방으로 찾아와서 “이창호는 천재야”라고 했다. 무슨 뜬금없는 얘긴가 싶었는데 삼성화재배를 실황중계하는 KBS의 방송해설을 5시간 넘게 보고 온 것이었다. 단수 치는 것 외에는 바둑을 잘 모르는 친구인지라 어려운 내용의 바둑을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티고 본다는 게 신기했는데, 표정을 보니 이창호 팬이 다 되어 있었다. ‘난해한 바둑과 팬을 이어주는 해설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뿐이 아니다. 바둑계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바둑을 주제로 한 만화 게재를 위해 만화가 섭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화가가 바둑을 거의 몰라서 바둑방송 한 편을 보여주었다. 바둑 문외한에게는 너무 지루할 것이 뻔했다. 해서 “보다가 지치면 끄시라”고 했다. 그랬는데 만화가는 종국까지 모두 본 뒤 나를 보며 “정말 재미있었다”며 “이세돌은 진정한 천재다.”라는 말까지 했다.

‘바알못(바둑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익살스럽게 부르는 표현)’도 열광하게 하는 게 바로 해설이다. 바둑팬들은 바둑해설을 접하는 일이 많을 터인데 다른 스포츠 분야의 해설가가 바둑해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들어볼 기회는 그리 없었을 것이다.

마침 바둑을 아주 좋아하고 현직 유명 축구해설가인 한준희 KBS해설위원과 박정상 바둑해설위원이 두터운 교분을 쌓은 사이라는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이 만나 바둑과 축구 '썰'을 푸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준희 위원과 박정상 위원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소문난 해설가라서 자연스레 '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해설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도 각자 지론을 밝혔다.



●○ 축구해설자와 바둑해설자의 인연(아이스버킷챌리지가 유행하던 때에 바둑계로는 처음으로 박정상 9단이 지목 받았는데 그때 지목한 사람이 한준희 위원이었다) ●○
※ 아이스버킷 챌린지: 루게릭병 환자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된 사회운동.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준희: 어릴 때부터 바둑을 좋아했고 박정상 9단을 해설자로서 흠모했다. 아시안게임이 있던 2013년, 수십 명의 스포츠종목 KBS해설위원들이 위촉장을 받았다. 그때 처음 박 9단을 만났다.

박정상: 그때 제가 KBS방송해설을 하던 첫해라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한준희 해설위원님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 해설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한: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바둑이 스포츠 종목으로 편입됐긴 하지만 다른 스포츠들과는 조금 다른 게 사실이다. 다른 종목의 해설자들은 바둑을 생소해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박 9단에게 말을 걸었다.

박: 저 역시 원래 축구를 좋아하고, 한준희 해설위원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한 위원님은 프리메라리그 해설을 하셨다. 축구해설자가 많지만 그 중에서 한 위원님 스타일을 가장 좋아했다.

한: 펜싱·유도·카누·카약 등 무수히 많은 종목의 해설위원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는데, 바둑해설자와 얘기를 나눌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날 박정상 9단과 밥을 같이 먹었다. (이때 한준희 위원의 부인은 “그날 남편은 내가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아,라며 상기돼 있었다.”고 전했다.)

▲ 2014년 아이스버킷챌린지가 유행할 때 한준희 축구해설위원이 박정상 9단을 지목해 박 9단은 얼음물을 뒤집어 쓰며 동참했다.


한: 수많은 스포츠 종목 중에 바둑이 가장 모범적인 해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실력자가 대국을 한다고 해도 95% 이상 깊이 있는 분석을 해 주어야 한다. 또 장시간 시청자를 재미있게 해줄 말주변도 필요하다. 물론 여러 스타일의 바둑해설자가 계시지만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해설’이라는 단어가 요구하는 정의를 바둑해설이 가장 충족시킨다고 본다. 특히 박정상 9단의 해설이 그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적이다. 정말 좋은 해설자다. KBS 피디 두어 분에게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건넨 적도 있다. “KBS해설 중 전 종목을 통틀어서 최고의 조합은 박정상, 최유진 조합이다.”

●○ 축구와 바둑에 해박해지다 ●○

한: 어릴 때부터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에 관심이 많았다.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보고 생각하고 기억했다. 복싱을 예로 들면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무하마드 알리, 켄 노턴, 래리 홈즈, 토마스 헌즈, 로베르토 두란, 슈거레이 레너드, 윌 프레도 베니테스에 이르기까지 다 관심을 두었다.

박: 제가 증언을 할 수 있다. 한 위원님과 만난 날 바둑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옆으로 이용철 야구 해설위원께서 오시더니 ‘한 위원은 배구해설을 만나면, 배구의 역사, 선수, 스타일을 얘기하고 권투해설위원을 만나면 권투의 역사를 읊더니, 이번엔 바둑이네. 햐~”라고 하셨다.

한: 그날 조치훈 9단이 명인타이틀을 따낸 뒤 조훈현 9단과 KBS에서 기념대국한 얘기도 나눴다. 조남철 김수영 선생님 등의 방송해설을 재미있게 보면서 자랐다. 나중에 유건재 같은 분들의 해설도 재미있게 들었다. 지금은 축구가 직업이 되어서 가장 많이 아는 분야가 되었지만...하하.

▲ 한국기원을 방문한 한준희 해설위원이 한국기원 3층의 미니바둑박물관에서 '국수들의 손'을 보고 있다.


●○ 바둑의 매력 ●○

한: 수학적이고 논리적이서 좋았다. 얼마 전까지도 컴퓨터가 제대로 해낼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둑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게 가능해진다면 터미네이터 세상이 될 거라 봤다. 대학시절부터 제 전공이 논리·분석철학이다. 자연과학대학 해양학부를 들어갔지만 3학년 때부터는 철학공부를 했고 대학원을 과학철학으로 석사를 했고, 미국에 가서는 철학과 박사과정을 했다. 중퇴를 했지만…. 해양학은 2년, 철학은 약 10년 했으니까. 해양학보다는 철학을 한 기간이 길다. 바둑이 논리철학 유형의 작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바둑의 창의적인 수들은 멋져 보이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법칙 하에서 공식을 거쳐 도출되는 것이란 걸 알파고가 알아냈다. 생물울 환원시키면 화학물질이 되고 그것을 환원하면 물리적물질이 되는 것과 같다. 바둑의 그런 속성을 컴퓨터가 구현해 낼 줄은 몰랐다. 그런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바둑에 어린시절부터 매료돼던 것 같다.

박: 동감한다. 인공지능의 수법을 연구하다 보면 생각하는 방식이 인간과 흡사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물론 시대를 앞서 나가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는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세돌이 형이나 커제와 대국한 알파고 버전, 그리고 엘프오픈고의 수가 모두 인간적이다.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아예 다른 방식을 통해 수를 도출해 내는 게 아니라. 우리 사람이 단수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도달했듯이 이기는 방식의 근본은 인공지능이 사람이나 같은 것 같다.

●○ 좋아하는 기사 ●○

한: 넘버원은 조치훈 9단이다. 물론 조훈현 9단이 응씨배에서 우승해서 한국바둑이 성장하게 한 업적이 크긴 하지만, 어린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심장부를 강타하고 일인자가 된 조치훈 9단은 국민적 영웅이었고 제 꼬마시절의 우상이었다.
저는 데뷔할 때부터 좌우명을 하나 가지고 있다. ‘오늘 하는 방송이 마지막 방송일 수 있다’고 고 다짐하는 것이다. 한데 조치훈 9단도 ‘목숨을 걸고 둔다’는 좌우명을 가졌다. 이런 부분도 마음에 든다.
그리고 조치훈 9단의 바둑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타개의 귀재 조치훈 9단의 바둑은 짜릿짜릿하다.
요즘은 안국현 9단의 팬이기도 하다. 2018 삼성화재배 개막식 직전엔 안국현 9단으로부터 지도기를 받았던 게 기억에 남는다. 안국현 9단이 결승1국을 치를 땐 제가 명예심판이 되어 대국개시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날 안국현 9단이 이겨서 정말 기분 좋았다.


▲ 2018 삼성화재배 결승1국에서 한준희 축구해설위원이 명예심판으로 대국개시 선언을 하고 있다.


●○ 언론의 역할 ●○

한: 스포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어떤 사람이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려면 당연히 미디어의 역할이 크다. 조치훈 9단의 경우 명인을 따낸 게 워낙 컸다. 당시는 바둑이 신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매일 10개 이상 신문에서 기보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신문이 주최하는 기전의 소식도 실어줬다. 요즘 스포츠 지면에서 축구·야구가 규칙적으로 지면을 차지하듯이 바둑이 그랬다. TV채널은 4개뿐이어서 사람들은 신문 보던 맛에 살던 시절이었다.

박: 김인 국수님이 조남철 선생님을 이기고 타이틀을 따셨을 때 동아일보 면이 4~5개였는데도 바둑이 1면에 실렸다. 60년대 얘기다.

●○ 바둑을 때때로 두나 ●○

한: 비는 시간이 생기면 수시로 사이버오로에서 바둑을 둔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바둑으로 푼다. (한 위원은 부인은 '남편은 바둑 승부욕도 강하다. 한번은 오로에서 바둑을 두다가 인터넷이 끊겨서 바둑을 졌는데, 그게 통신사가 공사 중이었던 탓이었다. 그런데도 남편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했다. 바둑 둘 때 전화가 오는 것도 싫어한다.'고 했다)

한: 전화가 걸려오는 게 싫을 때로 말하자면 오전 10시쯤 오는 전화도 그리 반갑지 않다. 새벽까지 해설을 하고 아침 8~9시부터는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리면….^^;


●○ 바둑해설과 축구해설의 비슷한 점 ●○

한: 모든 해설이 조금씩 비슷한 속성이 있지만 바둑은 스포츠적 측면에서 축구와 비슷하다. 축구는 점유율이 우세하고 한 팀이 우세해도 결정적 순간에 득점을 실제로 못하면 흐름이 바뀐다. 방심하고 느슨하면 어느 순간 이상해져 있다. 추가시간 몇 분 만에 두 골을 허용해서 지기도 한다. 바둑도 불과 몇 수 안에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몸으로 부딪치는 것은 아니지만 축구처럼 다이나믹하다.

박: 10년전에 목진석9단과 함께 베이징에서 열리는 세계대회에 갔다가 숙소에서 각자 침대에 누워 바둑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그때 저희가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바둑판에서 나오는 천변만화가 바둑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바둑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했다. 이렇게 다이나믹한 바둑을 팬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도 숙제다.

●○ 기록과 정보 ●○

한: 박정상 9단은 바둑선수 출신이지만 저는 축구선수 출신은 아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만 그나마 커버가 된다. 비선수출신으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마이크 앞에 설 자격이 줄어든다.
축구 메커니즘을 습득한 선수출신의 해설자가 방송적인 요소를 갖춘다면 그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비선수출신 해설자가 두 배 가량 더 많다. 선수출신에 비해 습듭력·해석력·말주변 등 이런 요소들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어서라고 본다. 또 선수출신보다는 유럽 축구를 많이 보아왔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선수출신 해설자를 발뒤꿈치라도 따라가려면 꾸준히 공부해야 하고 뉴스도 잘 챙겨봐야 한다. 축구계는 정말 글로벌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뉴스가 생산되고 있다.
공부한 것은 해설에서 사용하는데, ‘적절한’ 시점에 활용해야 한다. 해설자마다 순발력에서 차이는 있는데 이것은 바둑해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연습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방송의 적응도나 소질의 차이도 있겠다.


박: 지금은 믿기지 않는 얘기겠지만 2000년대에는 박영훈과 박정상이 바둑공부를 가장 열심히 한다고 소문났다. 해외나 지방에서 열리는 세계대회나 한중일 신예대항전 등에 가면 항상 영훈이와 내가 같이 방을 썼는데, 밤에 심심하니까 누구의 바둑인지를 맞히는 퀴즈를 했다. 첫수는 우상귀 화점, 둘째 수는 어디 이런 식으로 입으로 기보를 늘어놓는 것이었는데, 보통 10수에서 15수 이내에 답을 맞혀냈다. 하하. 그런데 지금은 불가능하다.




●○ 바둑해설이 꼭 갖춰야 할 것 ●○

박: 한준희 해설위원의 해설을 보다가 가슴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프리메라리그가 열리는 새벽이면 잘 봤다면서 위원님께 문자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축구를 좋아한다면 레알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대해선 누구나 팬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데포르티보나와 세비아의 팬은 별로 없다.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기 때문이다. 누군지 모르겠는 선수들이 뛰고 있는데도, 한준희 해설위원님의 해설은 재미있다. 한 위원님의 해설은 훨씬 덜 유명한 팀의 경기에서도 빛을 발한다. 카메라가 언제 어디를 비출지 알지 못하는 법인데, 어떤 중요해 보이는 사람이 카메라에 잡히니까 한 위원님이“헤타페 구단주입니다. 후원사 부회장이 관전하고 있네요”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다. 이런 전문성 있는 해설이 팬들에게 믿음을 준다.


●○ 바둑해설에서 샤우팅을 한다면 ●○

한: 이미 나오고 있다. 송태곤 해설위원이 (대표적으로) 하고 있다. “저길 둬요?”라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감탄사를 내뱉는 것 말이다. 바둑은 축구에서 골이 들어갈 때처럼 소리를 지를 수는 없고 (그런데도) 그와 꼭 같은 리액션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주 좋은 수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떡수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리액션으로 표현한다. 그 리액션은 재미의 한 요소다.
박정상 9단의 경우는 평균적인 성량이 커진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몇 시간을 하면 목이 쉴 것이다.
이현욱 해설위원의 경우 ‘승단전’이란 프로그램에서 해설하는 걸 재미있게 봤다. 개그·위트가 좋다고 생각한다. 안형준 해설위원은 잡학다식하다. 각자 개성이 있다. 모범적인 것 같으면서도 리액션을 잘 섞는 게 안형준 해설위원의 특징이다. 박정상 위원의 자리를 위협하는 후배일 것이다.


박: 위협받을 만한 지위가 없다. ^^

한: 다만 해설에 관해서 준비를 너무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축구 역사를 넘어 방송 역사에서 불후의 멘트는 송재익 선생이 남긴 “후지산이 무너집니다.”이다. 1997년 한일축구전에서 중거리슛으로 일본을 꺾을 때 그것을 표현하신 것이다. 이렇게 그 상황을 한 줄로 축약하여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저런 멘트를 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해 오면 대부분은 해설을 망친다. 또한 준비해 둔 것이 아까워서 쓰고 싶어지는 마음에, 맥락에 안 맞게 사용하게 된다. 공부를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프린트해 와서 쌓아놓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해놓은 뒤 머리에 넣어놓고서 해설할 때는 그때그때 꺼내는 게 좋다. ‘A4 용지’가 많으면 중요한 장면에서 역사를 읊고 있을 수 있다. 불후의 멘트는 즉석에서 나오는 법이다.

●○ 꼽을 만한 멋진 멘트 ●○

한: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최근에 한 경기이고 가장 중요한 경기는 다음 경기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최근 경기인 FC서울과 부산 아이파크 간 플레이오프였는데, 부산이 안타깝게 승격을 못하는 순간이었다. 1차전 때 한 선수가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그 여파로 부산이 못 올라갔다 그때 마무리멘트를 했다.
“노란 카드 두장이 모여서 빨간카드가 되고, 빨간 카드 하나가 시즌을 망칠 수 있다. 그걸 느낀 플레이오프가 아니었나 싶다.”


박: 그 경기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패자 인터뷰를 보면서 부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리액션 얘기를 하셨는데, 제가 한국선수와 외국선수가 대국할 때는 감정이입이 되어서 확실히 목소리가 커진다. 2018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안국현 선수가 대 중국전을 펼칠 때 해설을 하면서 꼭 이겼으면 하는 마음, 한국선수를 어필하고 싶고 한국바둑을 어필하고 싶은 마음에 피곤도 느끼지 못하고 목소리 톤이 자꾸 높아졌던 기억이 난다. 다만 내 해설을 팬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반응을 알기가 어렵다. 수많은 뉴스과 댓글이 나오는 축구와 바둑이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다.

한: 꼭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잘못 걸리면 욕 무지하게 먹는다. 반응이 적은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 해설 중에 실수하면 ●○

한: 바로 “죄송합니다” 하고 고친다. 해설자도 시청자와 똑같은 화면을 보기에 등번호가 잘 안 보일 때도 있어서 17번을 7번으로 잘 못 볼 수도 있다. 선수 호명을 잘못했다면 0.1초 안에 사과하는 것이다. 선수 교체가 일어났을 때 최대한 빨리 시청자에게 알려주고 전술변화까지 분석해주는 게 해설자의 책무다. “포백을 쓰리백으로 바꿨군요” 했다가 “다시 보니 그냥 포백이군요.” 한 적도 있다.

박: 제가 다른 해설자들보다 나을 건 없어도 그나마 다른 해설자보다 최소한 뒤처지진 않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점이, 실수했을 때 백 퍼센트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간혹 축구에서도 두루뭉술 넘어가는 해설자가 있는데, 저는 옳은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축구는 비선수출신 해설자가 많다 ●○

한: 에이스 해설자는 대개 선수출신 해설자다. 이영표, 박지성, 안정환, 최용수 해설자들이 다 선수출신 해설자다. 예전에도 비선수출신 해설자가 활동했다. 언론인 이의재 선생님이 TBC에서 KBS로 와서 해설하시기도 하고 그랬다. 저희 세대가 최초의 비선수출신 해설자들이 나온 세대는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저희 세대에 비선수출신 해설자가 많아진 큰 이유는 이렇다. 예전에 브라질과 잉글랜드가 붙는다고 하면 중계진은 호나우두와 베컴밖에 몰랐다. 지금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느린 화면 3번 나오면 비로소 “9번은 프랑스팀의 누구네요.” 하고 말하는 식이었다. 시청자들도 항의하지 않았다. 시청자도 똑같이 몰랐으니까.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마니아층이 늘어나서 상황이 바뀌었다. 중계하는 사람보다 시청자가 더 많이 안다면 중계할 필요가 없다.
야구도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가면서 이른바 메이저리그에 박학다식한 송재우 위원을 필두로 비선수출신 해설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누가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야 말이 되니까 그랬다. 해외축구가 더 보편화되면서 비선수출신 해설자들이 많아질 여건이 만들어졌다.


●○ 캐스터와 호흡 ●○

박: 캐스터와 해설자가 서로 다른 얘기를 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캐스터는 해설자보다 말을 더 잘한다. 그러면서 해설자의 지식을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비단 수에 대한 얘기뿐 아니라 주변 얘기일 수도 있다. 해설자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려고 하는 캐스터가 가장 원하는 캐스터다.
해설자가 해설 중에 캐스터가 모르는 내용을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게 싫어서 아예 물어보지 않는 캐스터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물어봐주었으면 좋겠다. 또는 아예 캐스터가 해박하여서 쿵짝이 잘 맞든지…. 결국 솔직함이 열쇠인 것 같다.


한: 저랑 생각이 같다. 싱크로율이 99.9%다. 안 좋은 캐스터유형을 말해 보겠다. A4용지 잔뜩 쌓아놓고 공부를 이만큼 해왔다는 걸 드러내려고 경기 흐름과는 무관하게 진행하는 캐스터가 있다. 저는 선수 교체가 일어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캐스터는 난데없이 “저 선수 오늘 257번째 출장이죠.” 이렇게 해버리면 생뚱맞다. 해설자와 캐스터가 아는 게 같을 수가 없다. 해설자가 캐스터가 잘 모르는 얘기를 던질 수 있다. 그럴 때 캐스터는 얼마나 적절히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잘 모르더라도 적절히 받아주면서 “공격을 강화하겠다는 얘기죠~” 정도 해줘도 좋은 캐스터다. 해설자의 말을 잘 모르겠더라도 최소한 그 맥락에서 어긋나지 않게끔 유추해서 한마디라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뉴스 앵커라면 화제성 있는 게스트를 모시지 않는가. 앵커가 각계의 전문적인 내용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물리학자가 나와서 입자가속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정말 방송을 잘하는 앵커는 게스트가 전문적인 말을 상식 수준에서 빠르게 파악하여 그 사람 말의 맥락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순발력있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이런 앵커가 유능하다. 캐스터 중에는 해설자가 너무 모르는 말을 한다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불만을 표시하는 캐스터도 있다. 그러면 저도 속으로 언짢아진다. 부드럽게 받아주면서 다음으로 넘겨주는 캐스터가 가장 편안하다.


●○ 바둑을 팬들이 더 만끽하려면 ●○

한: 제가 어릴 때와 비교하면 기전이 너무 적다. 그때는 기전이 정말 많아서 최고위전 같은 기전을 지방지가 주최했다. 기전이 많은 만큼 흥미로웠다. 조훈현 9단이 전관왕을 하며 타이틀을 휩쓸어도 재밌었고 춘추전국시대여도 재미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기전이 많아져야 스토리 생성에도 도움이 된다. 모든 스토리의 근간은 대회 활성화다.

축구계에선 레스터시티라는 작은 클럽의 우승이 조명을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질 정도로 기적적이었고 이것은 축구팬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바둑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조훈현 9단이 그렇게 강한데도, 하찬석 9단이 국수를 가져간다든지, 김희중 9단이 기왕전만은 놓치지 않았던 것도 스토리이며 이것은 흥미요소를 가진다.


박: 저는 바둑계가 좀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팬들이 좋아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바둑과 비교해 우리 쪽에서 부족한 부분이다. 우리 선배들이 그런 분위기를 못 만들었다. 기분이 언짢다든지 중요한 승부를 앞두고 있다는 핑계로 팬들의 바람을 외면하기도 했다. SNS로 팬들과 소통하는 면도 부족했다. 프로로서 그런 부분은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도 조치훈 사범님을 좋아하는데, 그분의 인생이 드라마라서다. 그분의 인생을 드라마로 만들준 사람들은 기자들이다. 조치훈 9단이 스토리를 기자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적었기 때문에 팬들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조치훈 9단이 기성전에서 패배를 한 뒤 불꺼진 장소에서 텅빈 바둑판을 보면서 몇 시간을 앉아 있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것을 바둑팬들이 알게 된 것은 기자들이 그걸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고 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한국바둑계에도 그런 게 있다. 농심신라면배 선발전에서 이창호 9단이 신진서 사범에게 지고 혼자 복기하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기자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누가 지거나 이런 사실뿐아니라 이런 스토리도 전해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영훈이 성진이 철한이가 지금도 롱런하는 것은 언론이 ‘황소 삼총사’로 불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을 묶어서 부르다보니 한 명이 앞서나갈 때 다른 두 명이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각각이었다면 이만큼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식어를 붙여줄 때 선수들은 훈련에 더 매진하게 될 것이다.


한: 축구는 선수들의 별명이 기본적으로 많다. 박주호 선수는 ‘나은이 아빠’ 이동국 선수는 ‘대박이 아빠’다. 과할 정도로 별명을 붙인다. 때로는 그게 안티를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메시, 한국의 펠레 등 역풍을 맞기도 한다.^^ 그럼에도 별명을 붙이는 것은 선수들의 롱런을 끌어줄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박: 저도 1년만 늦게 태어나서 송아지 사총사가 됐더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

●○ 바둑팬들에게 새해 인사 ●○

한준희 축구해설위원: 2018년 한국축구가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반전을 이뤄냈듯이 2019년의 한국바둑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계 속에 우뚝서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박정상 바둑해설위원: 바둑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만사형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국가대표팀 선수들 많이 응원해주십시오. 바둑팬분들을 생각하며 다같이 더 노력하겠습니다. ^^



한준희 축구해설위원
1970년 6월5일 출생
KBS축구해설위원
스포츠해설가
2018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 정보전략위원
2017.11 안산 그리너스 FC 선수선발위원
2017 일간스포츠 칼럼니스트
2015 경기도 수원 월드컵경기장 관리재단 이사
2011 아주대학교 스포츠레저학과 겸임교수
2008 다음카카오 칼럼니스트
2005.8 KBS 축구 해설위원
2003.8 ~ 2005.7 MBC 축구 해설위원
성남FC 선수강화위원장
풋볼위클리 편집장
축구전문 웹사이트 '사커라인' 공동운영

수상내역
2009 헬로! 풋볼 팬즈 어워즈 베스트 해설자상

박정상 바둑해설위원
1984년 8월23일 출생
배우자 김여원
2008 제1회 세계마인드 스포츠 바둑부문 남자개인전 은메달
2007 제3회 중환배 세계바둑선수권전 준우승
2007 맥심배 입신최강전 준우승
2006 한국바둑리그 우승
2006 제19회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
2006 제6기 신예연승최강전 우승
2006 제3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준우승
2005 바둑마스터즈 남자부 우승
2004 제8회 신예프로10걸전 우승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
  • 카카오스토리
  • 구글+
목록
댓글쓰기














확인

띄어쓰기 포함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400바이트)
윤실수|2019-01-03 오후 10:23:00|동감 1
동감 댓글
바둑과 축구의 해설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축구의 경우 오락으로 경기를 보지만 바둑은 기력향상을 위해 본다는 측면이 더 강합니다 따라서 바둑 해설은 단순한 승패 분석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케스터의 지나친 사족은 오히려 방해가 될수도 있습니다.
다정아비|2019-01-02 오후 3:49:00|동감 0
동감 댓글
한준희 박정상 해설위원 .분야는 달라도 대단한 해설가들 이시죠. 두분의 얘기 재밌게 정리해주신 김수광 기자님께도 감사드려요. 특히 해설가와 캐스터의 관계나 역할부분이 공감이 많이 됩니다. 두분..새해에도 충실하고 재밌는 해설.. 부탁드립니다 ㅎㅎ~
킬러의수담|2019-01-02 오후 12:45:00|동감 1
동감 댓글
어나운서의 미덕은 해설자의 설명을
끌어내는것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바둑중계를 볼때 최악의 상황은
진행자가 해설을 하는 것이다
술익는향기|2019-01-02 오전 12:20:00|동감 0
동감 댓글
긴 글이지만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명해설 뒤에는 나름 깊은 철학이 있고 남모르는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군요... 오로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해설은 김영삼 프로의 해설이었습니다.
해설도 성실하게 했지만 간간히 바둑계 뒷담화를 들려 주어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납니다..
윤실수|2019-01-01 오후 6:27:00|동감 4
동감 댓글
바둑 해설은 김성룡이 제일이었다. 그의 인기는 이창호 국수에 버금갔는데 미투로 낙마해 안타깝다. 디아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한후 다시 돌아오길 기대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