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설명 :‘네 수 늘어진 패’를 져 지난해의 가장 불가사의한 역전으로 꼽히는 김기용(왼쪽) 대 이원영의 한국바둑리그 대결. 바둑의 이런 의외성이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우려도 있지만 단체전이라 승부조작이 힘들다는 점에서 한국리그가 바둑토토의 첫 대상이 되고 있다.

바둑에 스포츠토토를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다시 불 붙을 조짐이다. 바둑토토는 지난해 한국기원 이사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하고 프로기사회에서도 70%의 지지를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바둑계의 신망을 지닌 국수 조한승 9단과 여류 최고봉 조혜연 9단이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편지를 쓰는 등 공개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제동이 걸렸다. 한국기원은 28일 국회에서의 공청회를 시작으로 재 추진 수순을 밟고 있다.

바둑토토에 대한 반대는 ▶예도의 가치를 지켜 온 바둑을 사행성 오락게임으로 전락시킬 수 있고 ▶바둑은 1대1 경기라 단체경기인 축구나 농구보다 승부조작이 쉬우며 ▶나이 어린 프로기사 들조차 승부조작에 대한 외부압력에 시달릴 수 있다 로 요약될 수 있다.

축구 등이 이미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걱정하며 고기 반찬 먹으려다 자칫 판이 뒤집힐 수 있으므로 욕심 버리고 그냥 살자는 게 요지다. 조한승 9단은 국수 상금을 몽땅 기부한 따뜻한 청년이고 독실한 신앙심으로 잘 알려진 조혜연 9단은 많은 책을 펴냈고 영어에도 능통한 재원이다. 이 들의 바둑을 걱정하는 마음은 순도 100%라 할 수 있다. 또 토토와는 무관하지만 최근 배구,야구 선수들이 불법 도박 사이트와 관련된 승부조작으로 구속되는 사태도 바둑 토토 반대 분위기에 힘을 싣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필자는 바둑토토에 대한 찬성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도박에 대한 논의는 영원한 평행선이다. 라스베가스는 어떤 이에겐 소돔과 고모라이고 어떤 이에겐 사막에 핀 신화다. 1기 국수전 결승에서 조남철 9단과 맞붙어 1대2로 패배했던 신호열 선생(작고)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학자였는데 젊은 시절 노사초 국수를 따라 전국을 유람하며 현상바둑(대국하는 기사에게 지방 유지들이 돈을 거는 내기바둑)을 뒀다. 내기가 추악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필자 역시 프로기사 들과 만원 짜리 내기바둑을 즐겨 뒀다.

세조 같은 조선의 왕 들이 내기바둑을 좋아했다는 기사를 쓰며 내심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나 용산 미술관에서 옛 선비의 비문에 적힌 “평생 바둑을 두었으나 내기바둑을 단 한판도 두지 않았다.”는 글귀를 볼 때도 거부감은 없었다. 내기는 즐겁지만 내기에는 폐해가 따른다. 그 선비는 폐해를 목격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기의 유혹을 평생 뿌리쳤으니 그걸 자랑 삼아 비문에 적을 만 했을 것이다.

도박 뿐 아니라 술과 사랑까지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토토 얘기를 하면서 도박의 ‘사악함’ 쪽에서 접근하느냐, 가벼운 오락 쪽에서 접근하느냐는 출발부터 너무 큰 차이가 있다. 하므로 토토 얘기를 하면서 도박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접어두고 상식선에서 접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스포츠 베팅은 서구 대부분의 나라가 하는 것이고 스포츠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팬을 늘린다’’ 정도의 선에서 말이다.

오늘날 영국 프리미어 리그든 미국 PGA든 다들 스포츠베팅을 한다. 메시나 타이거 우즈 같은 세계적인 스타 들 그 누구도 자신을 ‘도박판의 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도 초창기 야구에서 승부조작이 일어났고 그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런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 끝에 오늘날 서구의 스포츠 베팅은 생활화 됐다. 이젠 스포츠와 스포츠 베팅은 전혀 불편하지 않은 이웃처럼 살아간다.

바둑은 어떤가. 바둑은 꽤 특별하다. 그렇더라도 다른 스포츠와 달라 비교대상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바둑 스스로 이미 스포츠를 선택한 사실을 거부하고 시계바늘을 뒤로 돌리자는 얘기와 비슷하다. 축구에서 승부조작 사태가 일파만파 번졌지만 축구인 그 누구도 “토토를 중지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행위로 인해 축구가 무너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토토가 스포츠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스포츠 쪽의 찬사는 자주 듣는다.

지금 승부조작 사건이 4대 스포츠로 번지고 있지만 언론에서 토토를 중지해야 한다는 얘기 역시 들리지 않는다. 사건의 본질이 토토의 책임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바둑은 실수나 착각에 의한 역전이 많다. 승부조작이란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4대 스포츠 승부조작 사건처럼 범죄 집단이 개입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토토가 필요하다면 대중의 오해나 범죄집단의 협박, 유혹이 두려워 포기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바둑이 스포츠냐, 아니냐. 그리고 모든 스포츠 종목이 원하는 토토를 하느냐, 마느냐 얘기라고 본다.

바둑은 오랜 세월 제도권 밖에서 독야청청 외롭게 살아왔다. 조남철 9단은 자신을 ‘노름 대장’이라 불렀던 수표교에서 빨래하던 아줌마 들 얘기를 하곤 했다. (당시는 배우나 가수는 ‘딴따라’였고 스포츠 맨은 “잠재적 깡패’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6-70년대 직장마다 점심시간이면 바둑 두는 이 천지였던 시절에도 바둑은 ‘시간 도둑’이란 지탄을 받으며 사회의 외곽을 맴돌았다.

바둑은 뛰어난 기사 들의 국위선양과 더불어 대학에 바둑학과가 생기고 바둑TV와 인터넷 사이트가 생겨나며 비로소 동반자를 얻었다. 그러나 다른 종목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때 바둑은 오히려 팬이 계속 줄어들었다. 바둑은 비디오 시대와 그리 궁합이 맞지 않았다. 바둑을 뒷받침하는 ‘산업’이 거의 없다는 것도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 직장에선 점심시간에 바둑 두는 풍경을 구경할 수 없다. 전통적인 바둑 후원자 들은 점점 늙어가고 젊은이 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바둑의 위기는 이미 시작됐다. 저수지로 친다면 나가는 물은 계속 나가는 데 들어오는 물줄기는 거의 끊어져 바닥을 드러낼 날이 멀지 않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바둑이 외형적 성장을 보이는 것은 앞서 언급한 ‘동반자 들’ 덕분이다. 어쩌면 바둑은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바둑의 스폰서 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어느 날 스폰서 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지 모른다.

바둑은 예능이냐, 스포츠냐를 놓고 선택을 해야 했다. 군 문제, 진학 문제 만으로도 더 이상 제도권 밖에 머무를 수 없었다. 예총으로 들어가든지 체육회로 들어가든지 선택해야 했다. 어느 쪽을 가든 바둑은 100% 딱 떨어지지 않는다. 예능으로 간다는 것은 엘리트 위주로 간다는 뜻이고 스포츠로 간다는 것은 대중화 쪽을 중시하는 의미가 있었다.

바둑은 많은 비판(대근육을 쓰지 않는다)과 비아냥(바둑이 스포츠라면 고스톱도 스포츠다)을 견녀내고 대한체육회에 가맹했다. 바둑이 스포츠로 들어가면서 정부도 새로운 동반자가 됐다. 바둑은 난생 처음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보급 사업 들을 시행하고 있다. 바둑은 게임 중독 위험에 처한 어린이 들과 고령화 사회의 노인 들, 그리고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군 부대에도 꼭 필요한 최고의 게임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바둑은 이제 위기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본다.

스포츠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된 스포츠 토토는 이런 분위기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바둑이 토토에 들어간다면 바둑은 산업을 얻게 되고 제도권의 새로운 동반자를 얻게 된다. 더구나 그 수익은 대부분 바둑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보급활동에 쓰이도록 되어 있다. 오랜 세월 예도는 바둑이 추구하는 훌륭한 가치였다. 하지만 그를 내세워 바둑이 스포츠임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개인의 철학일 수는 있어도 바둑의 정책이 될 수는 없다. 토토로 예상되는 부작용을 세심하게 점검하고 대책을 세우자. 부작용이 두려워 모든 스포츠 종목이 원하는 토토를 거부하지 말자. 세상의 혼탁함이 싫다고 산속으로 갈수는 없지 않는가.

[박치문 전문기자 | 중앙일보 1월 20일자 무편집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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