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이룬 실력 발전에 비할 때 바둑에 대한 이론적 정립은 그다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용직 박사의 사이버오로 연재물(강좌나 칼럼)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문용직 박사가 을미년(乙未年) 설을 맞아 이번에는 ‘두터움’에 대한 6편의 강연을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기고했다. 편집자가 기억하기에, 두터움에 대한 본격적인, 최초의 강의가 아닌가 싶다. 17일부터 설연휴 기간 하루 한 편씩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특강1 - 두터움은 신비한 세계가 아니다 ☜ 클릭
특강2 - 형상과 감성에서 두터움이 나오다
특강3 - 형상과 변주를 오가면서 인식을 확장하다
특강4 - 단순한 형상은 본래 두텁다
특강5 - 중앙에서의 가벼운 세모, 만드는 이치
특강6 - 두터움과 세모의 확장이 포석의 길이다



설연휴 특집 - 두터움 특강 (2)
형상과 감성에서 두터움이 나오다


1. 두터움의 쓰임새와 정의, 그리고 세모의 이해

두터움.
잘 쓰고 계신지?
바둑이 아니라 일상에도 쓰고 계신지?

일상에서 두터움이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를 꼽아볼까. 도타운 인정. 두터운 인덕. 두터운 믿음. 그런 대로 널리 쓰인다고 할까. 일상의 쓰임새와 바둑에서의 두터움은 서로 다르지 않다.

두터움과 관련, 반상에서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살펴보자.

두터우면 공격당하지 않는다.
두터움은 공격에 써라.
이 정석은 요즘엔 백이 두텁다고 본다.
미세한 형세지만 두터운 흑이 약간이나마 남겠다.

언뜻 보기에도 여러 용법들은 서로 비슷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 모두가 하나의 속성을 본질로 갖고 있다. 초점은 약간 다르나 본질은 같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가?
이 글의 답은 그 어느 용법이나 세모와 네모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세모의 형상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용법들이다.

1도 (세모는 행마와 급소의 지향점)
하변을 보자.
흑1 이하는 유명한 가르침으로 거의 정형이다.

▼ <1도> 세모는 근거와 안정의 핵심

왜 그런가. 상변을 보자.
앞의 하변 백4를 손 빼면 당장 흑5를 당한다. 백은 집이 없어져 근거가 취약하니 달아날 수밖에 없다. 하변 백4가 반상 그 어느 큰 곳보다 급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런데 흑백의 형상을 보면 모두가 네모에 가깝다. 그러나 상변 백은 두모, 즉 선분에 불과하다.
세모나 네모를 취하지 않으면 담벼락이 무너진 것과 같으니 불안하고 취약하다.
그것을 엷다고 한다.

2도 (세모는 귀와 변에서의 착점 지향점)
두터움은 지적(知的)으로 즉,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 기반이 되는 기초를 먼저 쌓도록 하자.

여기 <2도> 우상귀는 돌 하나로 근거를 얻었다. 좌상귀는 둘. 좌하귀 백1 이하는 서로가 근거를 잃지 않기 위해서 경쟁하고 타협하는 과정이다. 우변 흑7은 주변 백이 강하니 흑이 자중한 것인데, 역시 네모 즉 정방형의 집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겠다.

▼ <2도> 세모는 귀와 변에서의 착점 지향점

그런 것이다.
세모나 네모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반상에서 행마가 지향하는 바이다.
집은 근거요, 네모이며, 안정이다.
안정하면 강하다.

바로 이 시각에서 돌아보시라. 글 처음에 밝힌 두터움의 용법 네 가지를 돌아보시라.
그 어느 것이나 이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터움이란 것은 다음과 같은 개념 정의를 갖기 때문이다.

정의(1): 세모 또는 네모가 제공하는 질감 또는 그 질감에서 얻는 힘.

정의(2): 안정성을 가진 세(勢)가 제공하는 질감 또는 그 질감에서 얻는 힘.

네모처럼 세모도 근거의 핵심인데, 적어도 세모(의 형상) 없이 집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세모”도 집의 다른 표현이다.
두 집, 즉 두 눈(眼)이라고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없어서는 아니 될 형상의 원형인 것이다. 눈은 모눈(종이), 그런 것을 뜻한다.

그러니 안정성이란 다른 말로 곧 세모인 것이다. 근거 즉, 집 없이 안정은 없으니까 말이다. 세모는 형상이요, 안정성은 형상을 볼 때 우리가 얻는 감성을 가리킨다.


2. 형상에는 감성이 개입되고 창조된다

삼라만상 세상 모든 형상에는 감성이 개입된다.
우린 그 어떤 형상에도 또 그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도 감정적 반응을 가진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거의 못 느끼는 수준이 될지라도 그러하다.
시원한 물맛은 정신까지 맑게 하지 않던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ㆍ1908~2009)가 명저 『야생의 사고』『신화론』등에서 밝힌 바가 그런 것이다.
인간. 세상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이항(二項)대립을 이용했다.
감각적 성질로 세상을 나누고 형태의 논리로 만물을 분류했다.
시간 범주가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도 그런 것과 다름이 없다.

동양의 오행론도 그런 류에 속한다.

바둑에서의 인식도 그런 것이다.
단순한 분류로 질서를 세우고 이치를 찾아낸다.

바둑에서는…, 아마도 형상이-거의-전부다.

바둑에서도 모든 형상에는 우리의 감성적 반응이 일어난다.
그리 보면 많은 것이 이해된다.

어느 장면에서 프로들이 “여기서는 이 감각 아냐?” 그리 말할 때, 그는 반상의 많은 부분을 하나 하나 검토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또 아무런 이해 없이 말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느끼는 것이다.”

느낌의 종합을 하나로 묶는 것, 그것이 “다음 한 수”이다.

바둑에는 그런 것이 발달해 있다.
반상은 형상의 세계지만 형상은 곧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곧 감성의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거 하나 이해하도록 하자.
다소 모호한 듯한데, 그러나 이해를 넓히면 두터움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반상은 2차원 평면. 그런데 우린 반상의 도형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걸까.

3도 (2차원 평면과 3차원 입체가 잡히는 조건)
돌 두 개가 놓이면(상변 A) 그 자체를 각자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든지, 또는 두 개의 돌을 연결해서 하나의 선분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의 눈(眼)이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돌 두 개는 하나의 평면으로 인식된다.
기하학적으로는 선분이지만 인식은 평면적이 되는 것이다.

돌이 세 개가 되면(본도 하변 B) 3차원 입체감을 주는 입체적인 인상을 잡을 수 있다.
돌 3개는 세모의 형상을 만든다. 세모는 꼭짓점을 3개 가진 평면 도형이지만, 우리에게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런 질감 느끼게 해 준다.

▼ <3도> 평면과 입체

4도 (알파벳 부분이 입체적인 질감으로 다가온다)

짐작컨대 사이버오로(cyberoro.com)가 쓰고 있는 대국실에서의 형세판단 기능은 다음의 이해에 기반했으리라 본다.

<4도>는 정석의 결과로 서로가 둘 만하다.
흑집이 많아도 백의 경우 알파벳 부분은 집과 같이 인식된다. 그리고 발전적이다. 흑과 달리 바깥으로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 <4도> 발전성 있는 두터움은 집으로 인식된다

백돌의 형상은 세모다. 그럴 때 우린 형상만을 보지 않는다. 선분 즉, 돌이 만들어낸 운동감만을 쫓아서 인식하지 않는다.
선분만으로 이뤄진 형상은 운동감이 강할 뿐이다. 그건 <5도>를 보면 분명하다.

5도 (돌이 모여도 “두모” 즉 하나의 선분은 질감이 약하다)
우상귀는 정석 진행인데, 백8은 과했다. 흑9를 맞으니 집이 없다. 즉 형상이 하나의 선분에 불과하여 근거가 없다. 그래서 우상귀 백8이 아니라 좌하귀 백1을 정석으로 하는 것이다. 좌하귀는 근거를 얻고 있다. 변을 언덕으로 하여 세모의 형상과 다름이 없다.

▼ <5도> 두모와 세모의 차이

6도 (두모는 선분일 뿐이다 - 약하다)
우상귀는 흑이 나쁘다고 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때론 이리 둘 수도 있다.
초점은 우상귀에서 백6이다. 좁지만 저 호구 이음이 그렇게나 두터운 형상이다. 저 수를 둘 줄 알면 상당한 실력이다.

만약 두지 않으면?
그건 좌하귀를 보면 알 수 있다. 세모 즉, 집의 형상이 사라짐으로써 근거가 약해지면 두모 즉, 선분에 그친다. 돌의 물살이 고이지 않는다. 호수를 이루지 못한다. 반상의 생명력이 약해진다.

▼ <6도> 두모는 선분일 뿐이다

그런데 우상귀 백6을 둘 때 프로들은 어떤 표현하는가?
“두텁다.”
그리 표현한다.
아니, 감탄한다. “두텁다!”

마침표가 아니라 감탄 부호를 찍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터운 감성을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백6은 좁지만 다부진 세모의 형상을 이루기 때문에 입체적인 질감과 발전성을 불러일으키는 두터움이 되는 것이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세모를 만날 때 프로들은 질감 느낀다.
두터운 질감 느낀다. 유명한 1국을 하나 보자.

7도(지나친 두터움인가)
흑2는 앞서 본 <6도> 우상 백6과 같은 수법이요 형상이다.
당연히 백1을 공격할 줄 알았던 검토실이 한탄했다. “너무 두터운데! 우리도 저리 두어서 이길 수만 있다면!”
사실 그렇다. 프로들은 저런 흑2를 좋아한다. 두고 싶다. 단점을 예방하여 그 얼마나 튼튼하고 뒷맛 좋은가.

그러나 프로들은 저런 흑2를 자주 두지는 못한다.
반상은 경쟁. 너무 느린 감이 있어 대세에 뒤질까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터움의 맛을 깊이 알기 위해서도 저런 수를 자주 두어야 한다.
느리더라도 그래야 반상 안목의 수준이 높아진다. (1967 제6기 명인전 도전 6국. 흑-명인 林海峰 대 백-9단 坂田榮男)

▼ <7도> 지나친 두터움인가

8도 (세모가 구도의 초점인 반상)
1951년 후지사와(흑)의 바둑인데, 저 흑2는 좀 불만이다.
흑2로는 여기 백3 그 자리를 또는 A까지 진격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쌍방(흑에게는 하변) 둥근 세모가 되는 걸 기하학적으로 음미하시라.

▼ <8도> 세모가 초점인 반상

<7도>와 <8도>를 비교해보면 <8도>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세모의 형상을 보다 뚜렷이 안겨주기 때문이다.

<8도>는 전국적(全局的)으로 돌이 연결되어 하나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감이 강하다. 기하학적인 입체감 없이 둘 수 없는 흐름이요, 구도다. 그 구도가 질감으로 전해진다.

그것이다. 그 질감.
바로 그것이 우리가 두터움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한다.
부분에서나 전체적인 구도에서나 세모 네모의 형상을 이루면 질감은 비슷하게 주어진다.

참고로 일본바둑을 예로 많이 제시하는 것에 말씀 하나 드릴까 한다.

글은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시간은 돈.
적절한 예를 제시하는 것엔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자료를 찾는 일이 만만찮다.
책을 이것저것 뒤져야 한다.

우리나라 바둑책으로 자료를 한 눈에 잘 보이게 편집한 책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없다. 『연감』이야 있지만, 총보를 뒤적이는 것은 실로 힘든 노력이다. 그리하면 이 글 못 쓴다. 벽돌 찾아서 언제 집을 짓는가.

요즘 일본바둑이 약하지만 그래도 기초는 일본만큼 넓고 깊은 데가 없다. 이해하시라.


3. 감성이 개입되는 형상, 작고 큼에 무관하나 발전성엔 유관하다

<6도> <7도> <8도>를 보면서 이런 인상 얻었을 것이다.
두터움이라는 질감은 형상의 크기에 관계없이 세모가 이루어지면 얻어지는 감성인가?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 주의할 것이 있는데 그건 발전성이라는 개념이다. <9도>를 보자.

9도 (발전성이 있어야 두텁다는 질감 온다)
우상귀와 좌하귀는 같은 모양이다.
어느 백이 두터운가?
우상귀 백은 집이 확실하다. 그러나 두텁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발전성이 없기 때문이다.
좌하귀 백을 두텁다고 말한다.

흑의 입장을 보자. 우상귀 흑은 어떤가? 세모의 형상인가?

▼ <9도> 발전성이 있어야 두텁다

10도 (세모가 되면 두터운 질감 온다)
우상귀 흑1을 둘 수만 있다면 세모의 형상이 이루어져 흑은 두텁다.
물론 A나 B, C 등도 세모를 이루는 좋은 수라고 하겠는데, 흑1보다는 형상에서 아름답지 못하고 간결하지도 않다. 물론 때에 따라 둘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를 보자. 좌하귀는 흑이 두모로 쫒기는 경우를 보여준 것이다.

좌하귀. 백은 흑을 끊을 수 있는 경우에도 때로는 이처럼 끊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우하귀 설명 참조)
우상귀 흑1이 좋은 모양이라 했는데 이 점을 다시 보자.
우하귀 백4에 흑5가(축 성립 안 될 때) 맥점이 되곤 한다. 이후는 알파벳순으로 흑이 강해져서 두터운 세력을 이루는 경우 많다.

▼ <10도> 세모가 되면 두터운 질감 온다

4. 형상을 이해하여 기반을 든든히 하자

때로는 형상이 불명확할 때에도 프로들은 두터움 표현 쓸 때가 없지 않다.
<11도>와 <12도>가 그 예다.

11도 (꼬부리는 수는 형상이 세모라 두터웠다)
“실전에서는 백A 막았지만, 이 수는 문제가 있다. 중앙이 엷기 때문에. 백1 꼬부려야 할 자리. 나라면 이렇게 두어 참고 있다가 뒤에 있을 싸움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고바야시의 자전기이다.
실전에서는 백A에 막았다. 그러나 다음 흑1, 백B, 흑C로 끊는 게 아팠다.(1985년 중일 슈퍼대항전 제12국. 백 馬曉春 대 흑 小林光一)

▼ <11도> 나라면 이렇게 막았을 것이다

12도 (빵따냄은 그 언제나 두텁다)
“백1 때리면서 승리를 확신했다. 중앙의 흑은 맛이 나쁘고 집으로도 분명히 백이 좋다. 게다가 이런 수를 두고서 진 바둑이 없다.”
슈코의 자평이다.(1985년 중일 슈퍼대항전 제12국. 백 藤澤秀行 대 흑 攝衛平)

▼ <12도> 슈코와 섭위평 - 승리를 확신

<11도>와 <12도>의 경우는 형상의 문제가 아니라 반상 형세판단의 차원에서 그리고 수읽기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수준이 높아지면 우리도 표현할 수 있으나 우린 먼저 형상과 모양, 초반의 행마, 그런 것에 관심을 두자. 요컨대 활용을 위한 기초적인 이해와 숙련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11도> <12도>는 2층, 3층 집에 해당되는 것이니 1층을 먼저 짓도록 하자. 가능하면 땅도 고르도록 하자.

프로가 되기 위한 공부에서는 많이 보는 공부가 최고라 한다.
명인들의 바둑을 보는데, 그냥 두어보는 것이 일이다.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똑같은 비중으로 두는 것은 아니다. 좋은 형상이 나왔을 때, 바로 그 장면에서 급소를 반복하는 것이다. 두 손가락 맵시 있게 모아서 “딱, 딱” 정정(丁丁)하게 두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왜 그런가.
몸으로 익히기 위해서다.

형상은 생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반상에 형상이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드리울 때 감성적으로 받아들여야지 생각으로 받아들여서는 늦기 때문이다. 왜곡되기 때문이다.

산정에 올라섰을 때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넓은 전망을 생각으로 붙잡는가? 순간이 지나면 곧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광활한 시야도 답답하게 개념으로 잡히지 않던가.

무심한 상태에서 형상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프로가 되기 위한 공부 중에 하나다.
가장 중요한 하나다.
그러나 우린 굳이 프로가 될 필요 없으니 먼저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다음엔 형상에 대해 마음을 풀어놓자.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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