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움과 발빠름은 현대바둑의 두 조류

▲ 조훈현(왼쪽)과 사까다. 두 기사 모두 엷은 바둑을 둔다. 타개를 전문으로 한다. 그럼에도 왜 그들을 골랐느냐? 그들의 안목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 두터운 수법을 쓰는가?

2015 을미년(乙未年) 설특집으로 ‘두터움’에 대한 6편의 문용직 박사 특강을 연재한 바 있다. 그간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자리했던 ‘두터움’의 실체를 구체적이고 뚜렷한 이론으로 설명한 문박사의 특강에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고, 더 연재해 달라는 요청에 한가위를 맞아 한번 더 특집으로 꾸민다. 문용직 박사의 두터움 강의는 사이버오로 회원들께서 수시로 음미할 수 있도록 추후 별도의 강좌코너로 전편을 묶을 예정이다. - 편집자 주.

한가위 특집 - 두터움을 통한 명인의 이해 (4)
생명력은 감성의 적극적 표현에 있다 - 사까다와 조훈현

행마(行馬)란 언어가 있다.

行馬.

어디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걷고 뛰는 것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알겠다.

반상은 19줄 세계. 제한된 세계.
그러니 빨리 걷는 사람이라면 19줄을 한달음에 왕복할 수 있겠다.

발(足)이 빠르다….
바둑에서 참 무서운 현실이다.

때문에
두텁다는 현상, 역시 실제를 알려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겠다.

1. 두터움과 발빠름은 현대바둑의 두 조류

현대바둑에서 두터움과 발빠름은 서로 대비되는 반상 이해.
기사들도 대별된다.

두터움을 적극적으로 써먹는 기사가 후지사와.
그가 즐겨 쓰는 휘호가 뢰(磊)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돌이 무지막지하게 굴러 떨어지는 이미지.
돌이 중층(重層)으로 쌓여진 이미지.

발 빠름을 대표하는 기사가 사까다.
그가 즐겨 쓰는 휘호가 찬찬(燦燦)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일본어 발음으로 3·三과 같다던가.

그는 전성기 시절에 3·三 한 수로 귀를 점거하고 발빠르게 포석을 펼쳤다.
알다시피 3·三은 3선에 위치해 있어 두터움과는 거리가 멀다.
두터움은 발전성을 중시하는 것.

사까다 못지않은 기사가 조훈현이다.
70~80년대 그를 두고 “빠른 창 부드러운 바람”이라고 이미지를 잡지 않던가.

두 기사 모두 엷은 바둑을 둔다. 타개를 전문으로 한다.
그럼에도 왜 그들을 골랐느냐?
그들의 안목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 두터운 수법을 쓰는가?
두 기사 모두 두터움을 모를 리 없다.
두터움의 이해와 지지 없이는 그 어느 바둑도 균형을 잡기는 힘들다.

▼ <1도> 백의 다음의 한수는?

1도 (사까다의 포석 질문 - 다음 한수는?)
사까다의 바둑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60년대 초.
육민사에서 「坂田의 바둑」(전 6권)으로 번역한 것인데, 그 첫 권은 포석이 아니라 「공격의 묘」였다.
사까다의 안목이 그대로 들어간 것이겠는데,
끊고 엉기는 싸움이야말로 반상의 본질이라 본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공격보다는 수비가 본령으로 실리를 먼저 취해놓고 약한 말을 수습하는데 승부를 걸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바둑에서 두터운 수법을 찾기란 백사장에서 바늘 줍기였다.
두터운 수법과 공격은 함께 하지만, 두터움과 수비는 함께 하지 않는다.
두터우면 공격당할 일이 생길 리 만무하다.

그의 「포석의 묘」에서도 두터운 포석은 찾을 길 없다.
45개 문제 중에서 말이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긴 하다.
그것이 <1도>.
저 장면에서 답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었는데 백을 잡은 여러분의 답은 어디인지?
(1962년, 제2기 명인전리그. 백 8단 坂田榮男 : 흑 7단 林有太郞)

▼ <2도> 사까다의 선택

2도 (사까다의 두터운 마늘모)
백1은 쉽게 예상 못할 거 같다.
그러나 정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제를 갖고 이창호에게 물어봤던 것.
다음 백의 한수는?

이창호는 즉각 여기 <2도>를 제시했다.
이창호와 사까다의 안목은 같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포석의 묘」에 나온 45개의 문제를 전부 물어보았는데-책을 한 권 쓰려고 부탁했었다-거의 대부분의 문제에서 견해가 같았다.

이창호는 계산에 밝고 집을 중시하지만 두터운 수법도 좋아하는 기사.
그런 그가 엷음의 사까다와 견해가 다르지 않았다. 수준은 같은데 취향이 다를 뿐이었다.

▼ <3도> 백1은 왜 답이 아닐까?

3도 (한칸은 답이 아니다)
왜 <3도>는 답이 아닐까.
백의 우변이 무너지는데 반하여 흑의 상변은 3선에 자리잡고 있어 아무런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2도>에서 백1을 두었을 때 그 백1이 우변과 함께 크나큰 세모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하자. 그것이 중요하다.

▼ <4도> 슈사쿠의 마늘모

4도 (슈사쿠의 마늘모, 두텁다)
슈사쿠의 마늘모다.
19줄 반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호수가 될 것이라 장담한 흑1.
A와 B를 맞본다.
흑1을 B 근처에 두면 백이 즉시 1에 두어 흑을 낮게 저위(低位)로 밀어버린다. 그건 흑이 집도 적고 세력도 없게 되어 못 견딘다.

<2도>와 여기 슈사쿠의 마늘모를 비교해보자.
마늘모는 대단히 두터운 행마로 돌 두 개로 만들 수 있는 바, 가장 세모에 근접한 형상이다.
마늘모는 4선 5선을 중시하는 현대바둑에도 잘 들어맞는다.
<4도>에서 다음 흑C가 눈에 잡히지 않는가. 그러면 백이 저위로 눌린다.

2. 조훈현의 포석 - 마늘모

조흔현을 먼저 보자.
사까다의 바둑을 뒤적거렸는데 적절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조훈현도 마찬가지.
정말이지 두터운 수법은 포석단계에서 찾기가 힘들었다.
싸움의 과정에서야 많이 찾을 수 있지만, 그건 여기 강의와 다소 거리가 있다.
그 경우엔 맥의 영역에 들어가서 두텁다기보다는 전투의 급소라고 할 수 있다.

▼ <5도> 조훈현의 다음의 한수는?

5도 (조훈현에게 묻다 - 흑의 다음 수는?)
1980년 「바둑」에는 “기풍과 취향”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매달 하나의 대국을 선정, 논란이 될 수 있는 장면을 뽑아 5-6명의 기사들에게
“당신이라면?” 묻는 것이다.

서로 다른 취향과 기풍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바둑의 넓이를 보여드리는 코너였다.
고급스런 기획물로 실력의 고하에 관계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강좌물이었다.

이 장면도 그 중의 하나인데, 다음 한 수는?
조훈현에게 물었다.
여러분의 답은? (월간「바둑」 1980년 9월호)

▼ <6도> 조훈현도 마늘모 둔다

6도 (조훈현의 안목은 두터운 마늘모)
조훈현이 제시한 답이다.
과연! 실로 두터운 수법이다.

우변과 상변이 저 흑3으로 인해 크나큰 세모로 큰 바람 일 듯이 부풀어오른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국면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두터운 수를 두는구나.

또 하나 조훈현다운 것은 흑1이다.

두터운 기사들은 흑1이 아니라 흑A, 백2, 흑B, 백C, 흑D, 백E까지 미는 것을 선호한다.
조훈현은 역시 두터운 기풍이 아니다. 다만 국면이 흑3 두터운 수를 요구할 뿐이다.

▼ <7도> 두터움에 대한 안목은 같다

7도 (과연 실전에서도 이리 둘까)
그의 바둑에서 두터운 수법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두터움에 대한 안목은 두터운 기사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리 말할 수도 있다.
그는 두텁게 두고 싶다.
다만 수습의 맥점이 눈에 환히 보이기 때문에 굳이 두텁게 둘 필요가 없을 뿐이다.

또 다른 기풍과 취향 질문(7도 장면)에서 조훈현이 답으로 찾은 것은 여기 백1이다.
이 장면에서는 여기 백1이 급소라고 했다. 과연 두텁다.

▼ <8도> 조훈현의 설명

8도 (분단 당하면 전체가 엷어진다)
왜 <7도> 백1이 답인가에 대해서는 <8도> 흑2를 제시했다.
흑2 이후엔 알파벳 순이 예상되는데 상변 백이 외롭고 하변 흑이 굳어지는 것도 백에게는 큰 손실이다.

조훈현이 마늘모를 좋아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듯했다.
여기 충분히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 점은 분명했다. 사까다의 경우에도 그런 인상 받았다. 그 이유는 잠시 미뤄두고 사까다를 잠깐 보자.

3. 사까다 - 공격을 위한 두터움

사까다가 두터움을 선택할 때에는 공격을 엿볼 때에만 그런 거 같다.
하긴 이것은 사까다만의 특징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격을 준비할 때에는 두터운 수법을 선호한다. 자신이 두텁게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근거가 안정된다는 것을 뜻하니 당연도 하다.

▼ <9도> 사까다가 두텁게 둘 때

9도 (사까다의 두터운 수법은 공격을 노릴 때)
사까다의 두터움은 상대를 공격할 희망을 안고 있을 때만 선택된다.
백2는 두지 않아도 삶에는 걱정이 없다.
(백2가 없어도 흑A는 백B 이하 백F까지 흑이 다친다.)

백은 그러나 노리고 있다. 하변 흑을 노린다.
그것은 우변 백6에 있어서도 알 수 있다. 백6 이후 흑G, 백H 선수 당하는 것은 매우 아프다.
그런데도 백6으로 인내한 것은 왜일까.

▼ <9-1도> 왜 참았을까?

9-1도 (참고도, 인내한 까닭)
백은 1로 머리를 내밀고 싶은데, 그것은 좌하 싸움을 예상하면, 차후 문제가 될 수 있다.
만약 중앙에서 흑이 두터워진다면 나중엔 흑2, 백3, 흑4로 잡으러 오는 것이 겁난다.
그래서 <9도> 백6으로 인내한 것이다.

<9도> 좌변이 당장 위험하지 않은데도 백2로 둔 것은 하변 흑을 공격하려는 준비로서 둔 두터운 수이다.
(1964년, 제19기 本因坊 도전3국. 백 本因坊榮壽 : 흑 7단 高川格)

▼ <10도> 공격을 위한 두터움

10도 (사까다는 근접전의 두터움을 선호)
사까다는 노림이 강한 기사.
그는 멀리 내다보면서 자신을 지키는 그런 두터운 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격의 경우에만 두터운 수법을 쓴다.

백1 이하가 사까다의 수법이 두터울 때를 잘 보여준다.
백5 마늘모가 아주 두터운 수법이다.
백5 이후엔 알파벳 순서인데,

물론 누가 두어도 이 장면에서는 백5일 것이나, 그 점을 미리 노려서 백1을 앞서 둔 것은 주목되어야 한다. (1951년, 제6기 本因坊戰 흑 本因坊橋本宇太郞 : 백 7단 坂田榮男)

▲ 빠른 창과 날카롭기 그지없는 면도날 바둑이 1981년 만난 적 있다. 당시 일본기원 이사장이던 사까다 9단이 한국기원을 방문했을 때 내한기념으로 속기대국 한 판 펼쳤다. 조훈현 9단 승. <사진/월간바둑>

4. 사까다와 조훈현 - 그들의 마늘모 애용은

엷은 바둑을 두는 기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두 가지 경우에만 두터운 수를 둔다.

많이 유리하든가,
아니면 상대 공격을 엿볼 때.

그 두 경우 외에는 두터운 수를 두지 않는다.

마늘모는, 엷게 두는 기사들이 두터움을 필요로 할 때 특히 애용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왜냐 하면 상대를 곧 눌러서 밀어붙이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4도> 슈사쿠의 마늘모 참조)

단순히 자신을 네모로 정돈하는 것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
반격의 여지를 남겨둔 두터움만이 그들에게는 적성에 맞는다.

▼ <11도> 조훈현이 두터움을 취할 때

11도 (조훈현의 응씨배 마늘모)
저 좁은 곳에서 조훈현은 놓치지 않았다.
흑2가 두터운 수법이었다.

이렇게 백3과 교환해 놓으면 다음 백A에는 흑B, 백C 두어놓은 후 다시 손을 뺄 수 있다.
참고로 백3을 두지 않으면 흑이 3에 두어 공수(攻守)가 역전된다.
흑2는 우하귀 흑에 남은 뒷맛을 깨끗이 한 두터운 수였다.
(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5국. 백 9단 聶衛平 : 흑 9단 조훈현)

▼ <12도> 조훈현의 마늘모 수비

12도 (임해봉에게 이겨서 강박을 넘어설 때)
확실히 조훈현에게 마늘모 수비는 매력적인 듯하다.
백2, 백4가 아주 적절하다. 다음 A와 B를 맞봐 백이 유망하다.
(1984년 한일 전문기사 교류전. 백 9단 조훈현 : 흑 9단 林海峰)

이런 반론 있겠다.
누구나 저 백2, 백4를 둘 수 있다면 조훈현의 마늘모라 말하는 것은 다소 작위적인 거 아니겠는가.

답변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저런 장면 저런 마늘모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국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독특한 것이다. 그것은 그 기사의 독특한 그 무엇이 작용했기에 그러한 것이다.

월간「바둑」 1984년 12월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강조가 있었다.

“대망의 한일 프로바둑의 본격교류가 재개되었다. 13년 만에 재개된 교류전에서 우리는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제 막연히 일본을 상수라고 생각하던 때는 지났다.”

이 바둑을 둘 때 한국기원 5층의 조훈현은 상당히 긴장된 표정이었다.
소년시절 저 멀리 있던 명인이 임해봉 아니던가.

마늘모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론이 더 필요하겠다.

「현대 미술의 원리」에서 리드(Herbert Read)가 말하기를,
“미술에서 운동감과 리듬을 원한다면, 색조를 줄이는 대신 선의 중요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바둑에서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발 빠른 기사들은 회화의 색조에 해당되는 두터움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빠른 변화를 원한다.

그렇지만 때로 두터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폭발력이 강한 마늘모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돌 두 개로 만들어낼 수 있는 행마법 중에서 간격이 가장 좁은 것이 마늘모다.
그러니 응축된 힘이 강할 것은 당연한 일.

▼ <13도> 포석 단계의 마늘모

13도 (마늘모는 포석에서도 두터운 힘을 낸다)
백1,
두텁다.

다음 2와 3은 맞보는 자리.

실로 백1은 두텁다.
흑으로부터 오는 모든 변화를 다 거부하는 듯하다.

백1 자리에 흑돌을 놓고 중앙과 좌변의 폭 변화를 음미해보시라.
<2도> <3도>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시라.

음미에 합당한 현실이자 표현, 그것이 바둑에서는 마늘모가 되겠다.
마늘모 하나에 온 반상이 저리도 압축되고 펼쳐지다니 말이다.

[다음편 11강] 두터움을 통한 명인의 이해 (5) - 감성의 억제와 균형의 세계 - 이창호와 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