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앞에 사람 없다! 승부는, 특히 바둑승부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부동심의 대명사 조치훈과 이창호가 1993년 11기 한일정상 TV속기전(MBC)에서 다시 마주앉았다. 승부는, 먼저 흔들리는 사람이 진다!
<들어가며>
이 글은 ‘SERI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양상국 九단이 ‘바둑, 경영을 만나다’란 주제로 바둑이 지니고 있는 경영적인 요소에 대해 강의한 내용입니다. 최근 사이버오로에서 <양상국 바둑사랑 55년>을 발간하면서 전편(총 15편)을 실은 바 있고, 이 가운데 월간『바둑』의 요청으로 강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바둑과 경영’이란 큰 카테고리로 묶은 글이기는 하나 내용은 조훈현이나 조치훈, 이창호 같은 세계적인 기사들의 승부에 얽힌 에피소드와 바둑동네의 생생한 이야기를 곁들여가면서 바둑 속에 들어 있는 경영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므로 나름 읽는 맛이 있을 겁니다.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신 내용일지언정 이 연재를 통해 바둑사를 반추하면서 긴 설연휴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10편을 골라 명절연휴 기간 연재합니다.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사이버오로 임직원 일동 배례(拜禮).
○● 설특집/ 바둑과 경영 (1)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후지사와 九단의 “4판만 이긴다!”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2)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조치훈 九단의 “목숨을 걸고 둔다!”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3)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4) ‘오뚝이’ 서봉수 九단의 도전정신 - 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5) 영원한 일등은 없다! 한국바둑, 어떻게 세계최강이 되었나?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6)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복기(復棋)에서 배우는 경영교훈 ☜ 클릭
<제7강> 자신감이 승부를 좌우한다!
반전무인(盤前無人)의 자세
반전무인(盤前無人)이란 말, 들어보셨죠? “바둑판 앞에 사람 없다”는 이 말은 상대를 의식하지 말라는 경구로, 상대를 의식하는 순간 부동심을 잃게 되고 이는 곧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일깨우는 교훈입니다.
바둑은 알고 보면 상당한 심리전 게임입니다. 바둑판 45.5cm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대국은 순전히 머리로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고 지략을 펼치는 승부인지라 심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골프 같은 종목도 그렇지만 상대의 실수로 승리를 얻는 측면이 강한 게임이 바둑입니다. 상대가 있기는 하지만 권투나 축구처럼 몸싸움이 없는 종목이기 때문에 자기 플레이만 충실히 하면 좋은 결과를 올릴 수 있지요.
그러나 몸싸움이 없는 종목일수록 ‘자신과의 싸움’이 강한 면이 있기에 심리적인 요인이 훨씬 더 작용합니다. 골프의 요체는 3C에 있다고 하지요. Confidence(자신감), Concentration(집중력), Courage(용기). 이 3요소는 어떤 종목에서나 그러하겠지만 특히 바둑에서 절실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3C는 경영 리더들에게야말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 때로 사람이 아니라 태산이 눈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듯한 느낌. 승부를 해본 이라면 안다.
상대를 의식하는 순간 흔들리고, 흔들면 진다!
왜 흔들리는가. 상대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평정심, 부동심이 승부에 얼마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84년 5월, 조치훈 九단과 녜웨이핑 九단이 한·중 바둑정상대결 3번기를 펼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조치훈 九단은 일본 랭킹1·2위 타이틀인 기성·명인을 갖고 있는 일인자였고 녜 웨이핑 九단은 일·중 슈퍼대항전에서 일본의 내로라하는 九단들을 11차례 연속 날려버린 ‘대륙의 반달곰’이었습니다.
외관상 중국의 일인자가 세계 일인자인(당시는 일본바둑을 세계 최고로 쳤습니다) 조치훈 九단에게 도전하는 모양새였지만 녜 웨이핑 九단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기력 또한 워낙 출중했기에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2대0, 예상외로 조치훈 九단의 완승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후일 녜 웨이핑 九단은 자서전에 이때의 대결에 대해 소회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재미있습니다. 녜 웨이핑 九단은 조치훈 九단이 일본바둑을 호령하고 있는 최고수이기는 하나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고 합니다. 그랬는데 대국장에 들어서서 막상 조치훈 九단 앞에 앉자 얘기가 달라졌다고 고백합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어떤 기(氣)가 좌악 밀려오는데, 마치 태산 하나가 앞에 떠억 버티고 앉아 있는 느낌을 받았고 그걸로 승부도 끝나버렸다는 겁니다. 상대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평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거죠.
▲ 84년은 당시 한국은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를 때였고 수교도 맺지 않았을 때. 한국에서는 이 3번기를 한중정상대결이라고 칭했지만 실은 일본바둑 일인자와 중국바둑 일인자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다. 타이틀이 걸리지 않은 친선대국의 모양새로 성사된 이벤트였으나 지면 치명적 내상을 입는 진검승부였다. 이 3번기에서 예상과는 달리 녜 웨이핑 九단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2대0으로 무릎을 꿇었다.
▲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린 이 대결은 KBS에서 조훈현 九단의 해설로 실시간 중계방송했다.
1992년 서봉수 九단이 일본 정상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九단과 후지쓰배 8강전을 벌이기 위해 부인과 함께 베이징으로 날아갔습니다. 일전을 앞두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초조한 빛이 역력한 남편을 곁에서 바라보던 부인이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당신도 떨려?”
그러자 서봉수 九단이 이렇게 답합니다.
“그럼 나도 사람인데 떨리지 안 떨리냐….”
이 대국에서 서九단은 분전했지만 졌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저도 수없는 승부를 경험했습니다만 말이 쉬워 ‘반전무인’이지 사실 이런 마음을 견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의식, 부담, 스트레스로 인한 압박은 은퇴하는 순간까지 승부사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언젠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씨가 “근육이 악보를 익힐 때까지!” 연습한다는 말을 듣고는 달리 대가(大家)가 된 게 아니로구나 했습니다. 무대공포증이 있건 없건 누구나 무대에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실수에 대한 공포감을 없애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최선의 장치는 오로지 연습, 두뇌가 악보를 깜빡 놓쳐도 근육이 저절로 움직일 정도의 연습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연주자건 승부사건 또는 경영자건, 누구든지 자신감은 모든 승부(행위)의 생명입니다. 자신감은 준비된 자, 실력을 꾸준히 쌓은 자가 얻는 프리미엄이며 이러한 프리미엄은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지닐 때 발현됩니다.
진짜 문제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1978년 푸에르토리코에서 23미터 높이의 줄타기 공연을 하다가 떨어져 생을 마감한 전설적인 줄타기 곡예사 칼 왈렌다(Karl Wallenda)는 줄 아래에 보호망을 설치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줄을 탄 곡예사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내가 한 증언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자신감에 대한 교훈을 심어주었습니다.
“칼은 그 줄타기를 하기 전 3개월 내내 이상하게도 떨어지는 것을 생각했다. 남편은 예전에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줄 위에서 걷는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떨어지지 않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평소 일꾼에게 맡겼던 곡예줄의 장치를 직접 살펴보며 버팀줄이 안전한지까지 철저하게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큰 공연을 앞두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자신감을 상실한 채 불안감에 떨었다는 얘기죠. 그러고 보면 어떠한 위기국면도 진짜 문제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내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신적 강인함이 결여된 비전은 좋은 아이디어일 뿐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빌 게이츠도 자신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소극적인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고 게다가 머릿속에는 온통 두려움과 좌절감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두려움과 실패뿐일 것이다.”
▲ 중국의 한 서예가로부터 '石佛' 휘호 편액을 선물 받은 이창호 九단.
승부세계에서 ‘부동심’, 하면 떠오르는 대명사가 이창호 九단입니다. ‘돌부처’…, 중국에서는 석불(石佛)로 불리고 있는 그는 어릴 때부터 ‘강태공의 환생’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놀라운 평정심을 보였습니다. 부동심, 평정심이야말로 승부사에게 더없는 무기입니다. 이것도 타고나는 것인지, 스승 조훈현 九단이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제자의 이러한 강점은 더욱 대비되며 돋보였지요.
“그 누구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다”던 이세돌의 자신감
1988년은 아직 이창호가 전방위로 나서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봉수 九단만이 조훈현 九단의 발목을 간혹 걸었을 뿐 그 누구도 조훈현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때에 방위병 말년인 유창혁 四단이 대왕 타이틀을 찬탈하는 일대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대왕전 도전기가 끝난 직후의 인터뷰가 더 놀라웠습니다.
“조국수님의 바둑은 강수가 많은 만큼 의외로 허점도 많다. 포석 중반 종반 다 강하시지만 이 가운데 종반 계산이 약한 편이다.”
지금까지 감히 누가 천하의 조훈현 바둑을 이처럼 평가한 사람이 있었던가요.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던 시절, 청년 유창혁은 이처럼 당당했지요.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조국수님을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 꽉 찬 자기확신이 있었던 겁니다.
▲ 이세돌이 태산을 넘었다! 2003년 3월 27일 사이버오로 뉴스는 이렇게 전했다. '기존의 4천왕(조훈현,서봉수,유창혁)을 제외하고 결승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최강 이창호의 벽을 넘어선 사람, 태산 같은 이창호의 그늘을 박차고 나온 '폭풍의 아들'! 이세돌 三단이 제7회 LG배의 주인공이 됐다.'
이세돌 九단의 등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창호 九단이 천하를 호령하고 있던, 그 누구도 이창호가 일인자임에 이의를 달지 않던 시절 이세돌은 당돌하게도 ‘내가 넘버원’이라며 “그 누구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확신에 찬 자기암시를 불어넣곤 했습니다. 예전 청년 유창혁이 당대 일인자 조훈현을 겁내지 않은 것처럼 청년 이세돌도 ‘천하의’ 이창호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었죠.
리더는 심적 압박이 크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리더 한 명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조직의 사기와 분위기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둑승부에서 마인드컨트롤은 절대적입니다. 자기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포커페이스’란 소리를 듣는 이창호 九단이 장기간 성적을 낸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창호의 부동심, 유창혁의 자신감이 조훈현이란 태산준령을 넘을 수 있게 한 거처럼 이세돌 또한 당찬 승부욕이 있었기에 이창호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조직이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강인한 정신력과 자신감으로 팀원들의 동요를 막고 냉철한 판단과 예지력으로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으신지요?
<계속>
▲ 이 연재는 ‘SERI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양상국 九단이 ‘바둑, 경영을 만나다’란 주제로 바둑이 지니고 있는 경영적인 요소에 대해 강의한 내용 중 일부를 설연휴 특집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최근 사이버오로에서 <양상국 바둑사랑 55년>을 발간하면서 전편(총 15편)을 실은 바 있습니다.
○● 양상국, 기사인생 55년을 담은 기념집 ‘양상국 바둑사랑 55년’ 출간 ☜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