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와 이세돌
이창호와 이세돌
[언론보도]
  • 중앙일보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2026-10-12 오후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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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중앙일보_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이창호와 이세돌 ☞클릭

어느 날 왕십리 한국기원에 갔더니 이창호 9단이 사무실 한쪽에서 웬 중년 남자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창호는 이제 막 일인자의 자리에 올라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 이창호와 대국이라니. 도대체 누구일까. 직원들은 그냥 일하고 있었고 가끔 이 바둑에 시선을 돌릴 뿐 아무도 곁에 가서 구경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속에서 이창호와 중년 남자는 편안한 포즈로 대국하고 있었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풍경이었다.

낯선 중년 팬과 바둑 둬준 이창호
항상 풍운을 몰고 다녔던 이세돌
물과 불, 정오의 태양과 정원의 흙


이창호는 대개 병풍이 쳐진 격조 있는 대국장에서 대국한다. 한데 마치 시골 툇마루에 걸터앉아 대국하듯 이렇게 아무 데서나 바둑을 둘 정도라면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 직원에게 살며시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다. 알고 보니 중년 남자는 그냥 찾아온 바둑팬이었다. 이창호를 보자 대뜸 바둑 한판 두자고 했고 수줍은 이창호는 거절하지 못했다. 진귀한 대국이 이뤄지게 됐다. 실례인지 잘 모르는 팬과 소박하고 겸손한 이창호의 대응이 만들어낸 희귀한 정경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이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너무 오래돼서 흑백 필름처럼 바래고 희미해졌지만 이창호의 젊은 날을 돌아볼 때면 그가 남긴 숱한 명승부에 앞서 이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이창호는 14세 때 첫 타이틀을 따내고 15세 때 스승 조훈현을 3대0으로 꺾고 국수위에 오른다. 16세 때 린하이펑을 제치고 세계대회 첫 우승자가 된다.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무엇이 이 어린 소년을 움직이는 동력일까. 그 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창호는 남을 비방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다. 테니스를 좋아하지만 스매싱은 하지 않는다. 이창호란 천재는 특이했다. 낮고 뭉툭했고 고요했다. 낯선 중년과의 대국을 생각하면 그건 이창호만이 가능한 특별한 이벤트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세돌을 생각하면 ‘술’이 떠오른다. 전라남도 비금도라는 섬에서 살던 유년의 시절에 아버지는 가끔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주전자에 술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면서 세돌은 홀짝홀짝 몇 모금씩 마셨다. 세돌의 누나 세나씨가 책에 쓴 이야기다. 서울에 와 권갑룡 도장에 들어가서는 진열장에 보관된 양주를 훔쳐 마셨다. 권갑룡 9단은 모른 체했다. “세돌이는 천재다. 그러므로 치외법권이 있다”고 말했다. 세돌은 성인이 된 후엔 술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딱 한 번이었지만 모두들 기절할 듯 놀랐다. 세돌은 그렇게 무모했다. 이세돌의 일탈과 저항정신은 바둑의 재능처럼 타고난 것이었다.

가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떠올랐다. 이성의 나르치스가 이창호라면 이세돌은 감성의 골드문트였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격돌한 LG배 세계대회 결승전이 2001년 새로운 밀레니엄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창호는 26세. 이세돌은 18세. 이세돌이 2대0으로 앞서가며 새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창호가 3연승을 거두며 3대2로 역전승했다. ‘아직은 아니다. 조금 기다려라’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배턴은 결국 8살 어린 이세돌에게 넘어갔다. 자연의 법칙이었다.

이세돌은 예리하고 격렬하다. 바둑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자신이 입상한 대회의 시상식에 불참하여 화제를 일으켰고 프로기사회에서 탈퇴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저항운동가랄까. 바둑계에서 풍운을 몰고 다니는 존재가 됐다.

이창호의 목소리는 낮고 이세돌의 목소리는 높다. 이창호가 물이라면 이세돌은 불이다.

명리학의 대가에게 의뢰해 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적이 있다. 결과는 내 생각과 반대였다. 이창호는 불 화(火), 그중에서도 정오의 태양이다. 이세돌은 흙 토(土), 그중에서 정원의 흙이다. 생명의 흙이면서 또 다른 생명인 정원의 나무뿌리와 싸워야 한다.

그러고 보니 이창호의 내면에는 타오르는 불이 있었고 이세돌의 반짝이는 눈빛에는 수줍음이 숨어있었다.

요즘도 이창호는 바둑을 둔다. 무적이던 예전과 달리 잘 진다. 하지만 이창호는 도인처럼 생명이 다할 때까지 바둑을 둘 것이다. 이세돌은 알파고와 대결한 이후 바둑을 떠났다.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가끔 TV 광고에서 그의 얼굴을 보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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