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둑계가 한국기원과 대한기원 둘로 갈라섰던 이야기
한국바둑계가 한국기원과 대한기원 둘로 갈라섰던 이야기
안영이 육성증언 (5) '기계파동'의 전말
[기획/특집]
  • |2023-09-30 오후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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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가을부터 2년여간 양립하던 한국기원과 대한기원이 다시 통합함으로써 ‘바둑계 내홍’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진은 1976년 12월 1일 최재형 한국기원 이사장(왼쪽)과 황용주 대한기원 이사장이 통합을 확정짓고 악수하는 장면..

이 글은 [월간바둑]이 2023년을 맞아 기획한 '바둑계 원로에게 듣는다 - 안영이 선생 육성증언‘입니다. 올초 설연휴 기간 1,2회 게재한 데 이어 나머지 원고를 이번 한가위 연휴에 연재합니다. - 편집자 註

○● 안영이 육성증언 (1편)/ 일본 본인방에게 ‘정선’으로 두라는 통고에 한국 국수는 ‘사퇴서’를 썼다!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2편)/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국수 김인의 사퇴서에 담긴 임전자세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3편)/ 國手 김인의 처음과 끝에 서 있었던 사람, 안영이!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4편)/ 한국바둑 60~70년대는 가난했으되 희망이 용솟음치던 시절이었다! ☜ 클릭

■구술/ 안영이
■구성/ 정용진



바둑계 최대의 사건, 75년 ‘기계 파동’

지금껏 한국기원은 곧 한국바둑계의 대명사였다. 그런 한국기원이 딱 한번 내홍을 겪으며 양분된 적이 있다. 이른바 ‘기계(棋界) 파동’ ‘기사(棋士) 분규’ 사태 때다. 이전부터 내재했던 프로기사들의 ‘권익 보장과 처우개선 요구’를 둘러싼 불만이 당시 한국기원 사무국장이 저지른 기전예산 횡령을 계기로 용암처럼 분출해버린 사건이었다.

- 한국기원 501호에서 [현현각]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이듬해 75년 바둑계에 큰 내홍((內訌)이 일어났죠? 이른바 ‘기계(棋界) 파동’ 또 어떤 이는 ‘기사(棋士) 분규’라 이르기도 하는데, 한국바둑사상 가장 큰 사건,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바둑계를 대표하는 협회가 한국기원과 대한기원 두 단체로 갈라져 2년 남짓 양립한 시기였으니까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대부분 기사들이 한국기원을 뛰쳐나가 새로 세운 (사)대한기원(大韓棋院) 위치가 공교롭게도 관철동 한국기원 근방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지근거리에 앙숙관계인 두 단체가 양립했으니, 프로기사는 아니셨지만 양쪽과 친밀하게 지냈던 선생님 처지에서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경우도 있었겠습니다. 이참에 당시 ‘기계 파동’ 전말에 대해서도 좀 들려주십시오.


“분규를 겪던 그 시절 한국기원은 이후락 총재-최영근 이사장 체제이기는 했으나 정사(政事)로 바둑계 일을 돌볼 틈이 없었고, 해서 사무국 행정 전반에 대해선 배상연 상무이사가 실권을 쥐고 그 아래 김재구 사무국장과 좌지우지할 때였지. 김재구 사무국장만 해도 10년 이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물이 고이면 썩기 쉬운 것, 그때 패왕전인가 예선전 예산을 그 양반이 중간에 착복, 횡령한 게 기폭제가 된 거야.

외면적으로는 그랬지만 실은 프로기사를 대변하는 조남철 선생과 사무행정을 장악한 배상연 이사와의 갈등이 표면에 분출된 거였어. 요새 가요계로 보자면 합당한 처우와 권리를 주장하는 아이돌 가수와 프로모터인 기획사 간의 첨예한 대립 같은 거지. 그때까지만 해도 프로기사의 역할은 링에서 뛰는 선수에 불과할 뿐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자연 의사결정에서 배제 당하기 예사였어. 이에 불만이 쌓여 왔던 터지. 그때도 일본기원은 지금처럼 섭외·보급·출판 부문별로 프로기사 이사(理事)가 수장을 맡아 이끌고 있었기에 대비(對比) 됐을 거고 상대적 박탈감도 컸을 테지.

내가 <棋界> 창간팀으로 한국기원에 들어갈 때 조남철 선생과 노국수 출신인 배상연 이사 사이는 이미 등이 져 있더라고. 어느 정도 심했느냐 하면 편집부의 최백산 씨가 명동에서 있던 송원기원(조남철 국수가 자신의 아호 松垣을 간판으로 운영하던 일반기원)에 출입했다는 이유로 조남철파로 몰아 싫어했을 정도였으니까.

▲ 기계 파동 당시 기사회에서 발언 중인 정동식 四단. 기계 파동은 프로기사와 사무행정을 장악한 배상연 이사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기계 파동’의 시작

67년 11월 숙원이었던 한국기원 회관을 건립하면서 기사들은 희망에 찬 분위기였어. 이제부터 한결 나아지리라 기대감이 잔뜩 컸는데 8년이 지나도록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는 거야. 오히려 연구수당(단수당)이 반으로 깎이지를 않나 사무국장이 대국료, 잡지 판매대금, 회관 관리비 등을 가로채 사리사욕을 채우지를 않나. 목소리를 전달해도 ‘일반 회사에서도 관리자와 기술자는 엄연히 분리해 운영하듯 기원운영에 기사가 뛰어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소리나 들었으니 마침내 불만이 폭발한 거지.

내가 한국기원을 그만둘 무렵인 74년 9월 마침내 프로기사들이 긴급 기사회를 열고 3개항을 한국기원 이사회에 요구하고 나섰어.

(1)기사 연구수당을 100% 인상할 것
(2)기사들의 기원 운영 참여를 보장할 것
(3)퇴직금 제도를 확립할 것.

1번과 3번 항목은 당장 돈이 없는 한국기원으로서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요구이므로 들어줄 수 없다는 식이었고, 2번 요구사항은 이렇게 답변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사들이 바둑이나 잘 두었지 뭘 아는 게 있다고 경영에 참여하느냐’ 하는 분위기였으니 어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겠어? 결국 두 달 뒤 11월에 대거 한국기원 기사회를 탈퇴하고 대한기사회를 조직하게 됐지. 이는 다음해 5월 대한기원을 설립하기 이전에 취한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1974년 10월 14일, 한국기원 소속 총 66명 중 51명의 기사가 ‘수익 현실화’에 대한 3개항의 요청을 담은 연명서를 한국기원 이사장에게 보냈지만 관철되지 않자 11월 1일부터 모든 공식대국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어 47명이 기사 사퇴서를 제출한 뒤 대한기사회(大韓棋士會)를 조직하는 집단행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바둑계 양분 사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국기원 기사회장이 김인 七단이었어. 공식대국을 거부하기 불과 한 달 전인 10월 2일, 40회 기사총회에서 기사들이 선거로 뽑은 회장이었지. 일인자를 내세운 건 사태해결을 바란 뜻이 강해서였는데, 김인 회장 또한 어떻게든 파경만은 피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일단 기사들부터 간곡하게 설득해 복귀시켰어. 물론 한국기원 이사진이 기사들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중재하겠다는 조건으로 말이지.

그렇게 신임 기사회장이 마지막으로 기사들과 한국기원 최영근 이사장 사이에서 중재를 했으나 이마저 무위에 그치자 격분한 기사들은 한국기원 이사진 퇴진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사장실을 점거, 농성을 하는 등 실력행사에 돌입했지. 머리띠를 두르고 극렬하게 앞장선 기사가 김수영 五단, 노영하 五단, 홍종현 四단 같은 젊은 기사들이었어.

한국기원 요청으로 종로경찰서에서 기동대까지 투입해 데모 진압에 나서기까지 했어요. 양팔을 잡힌 채 질질 끌려나오는 등 그때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극한투쟁을 했다 하여 한국기원 이사회가 적극 가담한 세 명의 기사를 제명처분해 버리는데, 이것이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악수 연발이었어요. 경향각지의 매스컴에서 비판적인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거든.”

끝까지 중립지대에 남았던 김인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기원은 세 명을 제명했음에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국바둑의 상징인 조남철 八단과 젊은 기수 윤기현 七단까지 추가 제명하는 등 초강수를 두었다. 이에 애초 연명(連名)한 51명의 기사 중 최종적으로 48명이 75년 3월말 급기야 한국기원을 탈퇴해 두어 달 뒤(5월 3일) 별도의 바둑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사)대한기원(大韓棋院)이다.

그때 기사회장이었던 김인 七단은 한국기원을 나오기는 했으되 끝까지 대한기원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안영이 선생의 만류 때문이었다.

“내가 말렸지요. 결국은 또 만날 텐데 다 떠나버리고 말면 나중 누가 중재를 하겠는가. 중간, 중립에 있는 사람도 있어야 양쪽을 접촉도 하고 중재도 하지 않겠나. 그때 강철민, 정창현 사범 정도가 무소속으로 김국수와 함께 행동했을 거야 아마.
대거 대한기원으로 적을 옮긴 상황에서 한국기원에 남았던 고단 기사로는 김재구 六단과 고재희 五단이 있었고 김봉선 五단, 김명환 四단 같이 조남철 선생과 초창기 우리바둑을 함께 열었던 기사들이 궤를 달리 했어요. 이 와중에 왔다 갔다 한 사람도 있었고요.'

▲ 당시 월간바둑(왼쪽)과 왕위전 관전기(오른쪽)에 실린 일부 기사들의 이적 소식이 첨예했던 양 기원의 대립을 말해준다.


75년 6월호 월간『바둑』에는 아래 사진을 실으며김국수의 중립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정중동(靜中動), 침묵 속의 김인 七단’
그는 지금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다. 반년을 두고 참으로 말 많았던 기사파동에 있어서 실질적인 주역이었던 김국수는 제일 먼저 기사직 사퇴를 밝혔는가 하면 지금까지 아무 측에도 가담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 거취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그-그의 흉중에는 무슨 감회가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김인 회장이 중립지대에 남은 것에 대해 김수장 九단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석했다. 1974년 9월 갓입단한 처지였기에 김수장 初단은 (형인 김수영 五단이 주도세력이었어도) 선배들 틈에 낄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처음엔 기사들이 한국기원을 곧장 다 뛰쳐나오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다가 10월초에 김인 국수님이 새 기사회장에 선출되었고, 한국기원 이사진과 협상하며 '담판 다 지었다. 결렬되면 내가 책임지겠다. 한국기원 소속 기사 탈퇴를 거두고 다들 복귀해라.' 호언하셨다가 결국은 뜻대로 안 되었죠. 아마도 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중립지대에 끝내 남지 않으셨나 생각해요.

일차로 한국기원을 탈퇴하고 기사들이 자리잡은 곳이 종로1가 무교동에 있던 무과수제과란 곳이었어요. 거기 2층이었나? 협소한 셋방살이였죠. 거기 있던 두세 달 사이 타협되었다는 소리가 돌았는데…, 하여간 그 무렵 저는 한 기수 입단선배인 김일환 사범, 2년 앞서 입단한 백성호 사범과 함께 속리산 여행을 갔다 올라오는 길에 대전에서 서봉수 명인 부친이 운영하는 기원에 들렀다가 거기서 관철동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자네들 기원 소식도 모르고 태평하게 유람이나 다닌다고 한소리 들었죠.'

- (다시 안영이 선생과 나눈 문답으로 돌아가) 기전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주관을 어느 기원에서 하느냐를 두고 다퉜을 거 같은데…. 주최사들이 곤혹스러웠겠군요.

“입단대회도 한국기원과 대한기원이 각각 따로 했어요. 갈라선 상황에서 한국기원 입단대회에 출전해 프로 면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홍태선, 권갑용 사범이 공연한 미움을 사기도 했어. 한철균, 임순택 사범도 양 기원이 합치기 직전인 76년 10월에 한국기원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가 된 기사였지요. 75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대한기원이 처음 연 일반인 입단대회에서는 최규병, 이형로 사범이 初단 면장을 땄어요.

여성기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분리된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대한기원이 차별화를 꾀하려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이에 앞서 9월 25~26일 우리바둑사상 처음으로 여류입단대회를 열어 여성기사를 별도로 선발하기도 했어요. 그때 조영숙과 윤희율 初단이 탄생한 거지.”

▲ 대한기원이 연 제1회 남/녀 입단대회 모습.


대한기원은 설립한 뒤 4개월 동안 공석이었던 이사장 자리에 황용주 씨를 모시게 되면서 틀을 갖췄죠. 그 무렵 소속기사가 50명쯤이었을 겁니다. 양쪽 다 해봐야 프로기사가 70명이 채 안되던 시절 대부분이 대한기원에 가담했으니 아무래도 대한기원이 중심이었다고 봐야겠지. 그러니 다수 기전이 대한기원 주관으로 열렸지요.

예로, 분규 탓에 잠정 중단상태에 놓였던 동아일보 주최 국수전의 경우 주관사를 대한기원으로 확정한 후 75년 12월 3일에야 20기 개막 예선전을 치렀어. 대한기원의 강력한 요청으로 한국기원 소속 기사는 일체 참여 못한 채 개막했지. 서봉수 명인이 차지하고 있던 한국일보 8기 명인전 개막도 마찬가지였고.

또 한국기원 월간『바둑』지와는 별개로 대한기원이 기관지로 발행한 잡지가 <棋道>지였고, 75년 10월 창간호를 선보였지요. 여러모로 양 단체가 대립했지요.”

▲ 대한기원 황용주 이사장(중앙 왼쪽)과 조남철 八단을 비롯한 기사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


‘기계파동’ 최대 피해자는 김인이었다

바둑계 분규 탓에 승단 피해를 본 대표적인 기사가 김국수이기도 하다. 그는 조남철 八단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八단으로 승단했다. 원래는 74년 봄 승단점수를 채웠으나 이후에 벌어진 기계파동으로 인한 행정공백 탓에 2년 반이나 지나서야-76년 12월 1일 한국기원과 대한기원이 다시 한국기원으로 통합한 연후에야 승단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한국기원이 발행한 86년 <바둑연감>을 보면 김국수의 八단 승단 연도를 74년으로 소급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76년말 승단이 확정됐다).

국내 최초로 입신(九단)에 오른 기사가 조훈현 국수로 그때가 1982년이었다. 김인 국수가 九단에 승단한 건 83년 4월, 딱 1년 뒤였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만일 2년 반의 승단(八단) 지체와 2년여 분규 기간 승단대회가 꾸준히 지속됐더라면 바뀌었을지도 모를 기록이다.

2년여에 걸친 기계분규, 기사파동은 통합 한국기원으로 헤쳐 모이되 기사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기사회에서 뽑은 실무이사(총무/출판/섭외)가 실질적으로 사무국을 운영하는 체제로 정비했다. 통합된 한국기원은 76년 12월 15일 이사회를 열어 새 이사장에 최재형 씨를 선출했고 기사회에서 내세운 실무담당이사 3인(총무이사 김인 八단, 출판이사 정동식 四단, 섭외이사 홍종현 四단)을 인준했다. 윤기현 七단은 기사회장에 당선됐다.

패왕전 관전필자로 활약한 박재삼 시인은 통합 1년을 보낸 77년 말 ‘바둑춘추’ 칼럼에서 “기계파동의 주요인은 운영을 기사 자신의 손에 의해서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단수당이 지급되고 두 개의 기관지가 하나로 되는 등 체제가 잡혀갔다”면서 “조용한 가운데 행해진 전진” “그래서 77년을 조용한 전진의 한해라 할만하다”고 평했다. 바둑계로선 쓰디쓴 경험이었지만 몸에 좋은 약이기도 했다.

- 74년 한국기원 월간『바둑』 편집차장을 끝으로 퇴사하고 한국기원 5층에 자리를 얻어 [현현각]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가을 무렵부터 기계파동이 야기됐고, 76년말 다시 한국기원으로 합치면서 끝이 났지요. 그런데 그때 선생님께서도 한국기원 총무부로 복귀하신 바 있더라고요? [현현각]은 어찌하시고?

“그것도 김국수 부탁 때문이었는데 사연이 좀 있어요. [현현각]을 만들어 한 1년 <현현기경>도 내고 그럴 때 한국기원 501호 내 방(현현각)은 놀기 좋아하는 기사들의 아지트가 돼 있었는데 분규가 딱 일어난 거야.
관철동 한국기원 건너편 모서리에 선술집 ‘꼬마집’이 있었고 그 옆에 위치한 신성빌딩 504호가 대한기원이었어요. 엎어지면 정말 코 닿을 거리였어. 양분돼 있을 땐 양 기원 간 갈등이 제법 컸을 때거든. 그러다 보니 참 웃지 못 할 풍경이 많이 펼쳐졌지.

고래싸움에 ‘눈치행마’로 [현현각]에 놀러왔던 기사들

한국기원 내 방에는 정창현, 하찬석, 조훈현 같이 놀기 좋아하는 기사들이 주르륵 올라와 온종일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말하자면 한국기원에서 보면 이들이 다 반대파 아니야? 딱히 갈 데도 없고 만날 놀던 데를 오고 싶지만 서로 싸우고 있을 때라. 대한기원 소속 기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음하자니 눈치가 보였을 거 아니겠어? 당시 한국기원 이사장실과 사무국이 2층에 있었어. 5층 내 방에 오자면 여길 지나와야 하잖아. 그러자니 쏜살같이 올라와 내 방에 쏙 들어오고들 했지. 하하.

하여간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기원이 대한기원을 다시 안는 모양새가 됐는데 그때 김국수가 총무 실무이사를 맡았어. 새롭게 재정비하자니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했겠지. 설렁탕집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올라오는데 ‘한국기원을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면서 총무부를 좀 맡아달라고 그래. 양쪽과 모두 통하는 사람이란 점도 고려했을 거야.
[현현각]을 벌려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미처 자리도 잡지 못한 처지라 고민했지만 김국수가 [현현각]에 돈도 묻은 사람이었고 또 그 사람은 한국기원 잘되는 일밖에는 생각지 않는 사람이에요. 해서 1년, 여기까지다. 도와주기는 해도 이 이상 도와줄 수는 없다고 선을 긋고는 정말 딱 1년 총무부서 근무했어요.

그렇다고 그 사이 [현현각]을 접을 수도 없잖아요? 해서 총무부장 시절 빈 사무실을 성춘복 시인한테 잠시 빌려주었는데 그때 예쁘고 참한 처녀가 타이프를 가지고 와서 사무실을 지키며 치곤 했어요. 성 시인의 조카였을 겁니다. [현현각]을 드나들던 서봉수 九단이 그 인연으로 결혼에 골인했지요.”

‘기계파동’은 김인시대의 변곡점

‘기계파동’을 겪은 75~76년 시기를 기점으로 10년 김인시대가 기울기 시작했다.

63년 10월 24일 열 살에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九단이 될 때까지는 결코 귀국하지 않겠다.” 굳은 결심을 보였던 꼬마 조훈현이 10여년 만인 72년 3월, 五단이 돼 돌아왔다. 병역의무 차 부득이 귀국한 것이기에 일본기원 적(籍)을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앞서 돌아온 하찬석 五단은 일본기원 四단까지 승단한 상태였지만 사퇴서를 내고 온 바 있다.

한국에서 아홉 살에 입단해 일찍이 二단까지 올랐던 조훈현은 도일 3년 만에 일본기원 기사로 다시 입단한 뒤 매년 승단을 거듭하는 놀라운 성장속도를 보인 천재였다. 71년 봄 초스피드로 五단까지 승단한 그는 六단 승단에 단 다섯 판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일시 ‘휴가원(休暇願)’을 내고 귀국했다. 그대로 눌러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스무 살의 조훈현은 군입대 직전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은 힘껏 성적을 내야겠구요. 제대 후에는 다시 일본에 갈 것인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갈 수만 있다면 다시 가서 몇 년 더 공부하고 나왔으면 싶어요.”

귀국하고 두 달 후(5월)부터 12월까지 72년 첫해 거둔 성적은 15승 4패. 주로 예선전적이었다는 걸 헤아린다 해도 첫해부터 승률 79%에 이르는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그렇긴 하나 73년 공군에 입대하기도 했고 고국 무대에서의 적응기가 필요했기에 타이틀(최고위) 획득까지 귀국 후 21개월이 걸렸다. 74년 1월 20일 운당여관에서 열린 14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3국까지 천하의 김인을 상대해 스트레이트(3대 0) 승리를 거두며 첫 타이틀을 땄다. 조훈현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 공군 복무 중 당대 일인자인 김인 七단을 꺾고 최고위에 오른 조훈현 六단이 관철동 한국기원 옥상에서 삼일빌딩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드디어 이륙하기 시작한 갈색폭격기.


10년 세도 김인이 3대 0으로 패퇴한 사실에 놀라기는 했다. 언젠가는 조훈현에 의해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란 사실을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때까지의 분위기는 김인 七단이 호령하고 있던 타이틀 중 하나를 잃었을 뿐이라 여겼고 김인의 시대가 당분간은 여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김인 七단 또한 최고위를 빼앗길 때만 해도 하나쯤이야…, 했다. 말년에 김국수는 “그때는 하나쯤 잃어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되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좀 더 치열하게 승부하지 않은 그때를 아쉬워하는 말을 했다.

승부의 세계란 기세(氣勢)다. 장강의 물결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기세가 꺾이면 거슬러 오르기가 쉽지 않다. 후배인 하찬석 五단이 국수를, 서봉수 三단이 명인을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73년까지 일인자의 포스를 유지해 오던 김인 七단이었다. 그런데 74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훈현에게 최고위를 넘긴 데 이어 7기 연속 움켜쥐고 있던 왕위까지 하찬석 국수에게 빼앗기면서 한국바둑은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에 들어섰다. 76년 봄에 이르러서는 패왕만이 유일한 타이틀이었다. 딱 기계파동과 겹치는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지만 다시 힘을 내 77년에는 기왕(김희중)과 왕위(조훈현)에 도전, 왕위 복귀는 무산됐으나 기왕을 쟁취하며 2관왕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참고로 77년 10월경 판도를 보면 3인의 삼국시대에서 조훈현 일인시대로 흐름이 몰리던 시기였다. 조훈현(왕위·국수·기왕·최고위·최강자·TBC왕위)-김인(패왕·기왕)-서봉수(명인), 모양상으로는 천하 삼분할 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77년 월간『바둑』은 그해 5대 뉴스로 ‘김인의 재기’를 5위로 꼽았다. 왕년의 김인시대 재현을 꿈꾸고 고군분투하는 면모를 높이 샀지만, 지난 10여년의 김인의 행적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이슈 자체가 ‘이미’, ‘어느새’ ‘왕년의 일인자’로 취급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김인 국수의 마지막 불꽃, ‘반구대’ 왕위 도전기

뒤돌아보면 김인 국수에게는 77∼78년 무렵이 메이저 기전에서 마지막으로 불꽃을 피운 시기였다. 74년 8기 왕위전에서 하찬석 五단에게 3대 1로 내줬던 타이틀을 9기 리턴매치에서 3대 2로 되찾아온 것이 마지막 왕위(王位)였고, 77년 김희중 五단을 3대 0으로 꺾고 기왕전을 차지한 것이 메이저 기전으로는 마지막 우승이었다.

이미 온통 조훈현 세상이 돼 있었다. 78년 3월 조훈현 七단은 서봉수의 명인까지 접수함으로써 8관왕에 올랐다. 8개 신문기전 중에서 7개를 휩쓸었다(신문기전 중 서울신문이 주최하는 패왕전 하나를 남긴 상태였다). 패왕 성주(城主)는 노익장을 과시하던 김인 八단이었지만 상대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몽골기병 조훈현이었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4월 11일 13기 패왕까지 인정사정없이 3대 1로 정복해 버렸다. (이후 김국수는 패왕을 탈환코자 14기, 15기 연속 도전했으나 77년 12기 왕위전에서 속절없이 조훈현에게 패퇴한 것처럼 3대 1, 3대 0으로 번번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 조훈현의 천하통일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는 월간『바둑』 78년 4월호 화보.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여세를 몰아 조훈현 七단이 하나 남은 김인 八단의 기왕까지 석권하고 전관왕 위업을 달성할 것이냐에 쏠렸다. 고독한 성주 김인 기왕을 향한 조훈현의 진군을 막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럴 때 질주하는 조훈현을 기왕전 본선리그에서 막아 세우고 도전권을 딴 사람이 김희중 五단이었다. 이렇게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조훈현 전관왕 달성’은 김희중이란 복병에 의해 일시 뒤로 미뤄졌으나 그렇다고 김인시대의 몰락까지 미뤄지지는 않았다.

78년 12월 5일 끝난 4기 기왕전 도전기에서 김인 八단은 도전자 김희중 五단에게 3대 1로 졌고, 이 순간 이후로 더는 메이저 기전 타이틀을 품지 못했다. 불꽃처럼 사그라진 70년대 마지막 무대였다. 79년 12월 국제신보가 주최하는 5기 최강자전(조훈현 七단에 2대 1 패배)과 한참 뒤 86년 4기 박카스배 결승5번기(강훈 七단에게 3대 1로 패퇴) 무대에 등장하고는 있으나 메이저급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은 기전들이다.

- 운명처럼 바둑 한길을 같이 걸었던 사람으로서 페이드아웃(fade-out) 되는 김국수를 바라본 심정이 남달랐을 거 같습니다.

“도전기에서 조훈현을 첫 대면하던 74년 최고위전이 생각나네요. 그간 도전기에서 만난 상대는 선배인 조남철 국수와 입단동기인 강철민 사범 같은 또래뿐이었으나 나이로 10년이나 격차가 있는 조훈현의 도전을 받았으니, 아마도 스승을 비롯해 대선배들만 상대하던 이창호 九단이 이세돌같이 나이어린 후배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심적부담을 느꼈을 겁니다. 74년 최고위 도전2국에서 필승 국면을 구축해 놓고도 종반 어이없는 실수로 흑 석점을 내주고 역전을 당하자 ‘이런 바둑을 이기지 못하면 이길 바둑이 어디 있겠느냐’며 허탈하게 웃던 김국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 김인(왼쪽)은 14기 최고위전에서 도전자 조훈현에게 3-0으로 패하며 타이틀을 잃었다. 짧은 머리에 ‘군기 바짝 든’ 공군 시절의 조훈현은 하늘을 맴돌며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모습, 영락없는 폭격기를 연상케 했다.


김국수는 조훈현을 어릴 적 9점바둑부터 많이 두어주고 죽을 때까지도 무척 아낀 후배였어요. 도일한 지 5년 8개월 만에 잠시 귀국했을 때(69년 6월) 기념3번기를 두어준 사람도 김인 七단이었고(정선으로 조훈현 三단이 2대 1 승리), 군에 입대하기 위해 72년 돌아왔을 때 대한일보 창간12주년기념 특별3번기(11월)에 기꺼이 나선 것도 김인 七단이었지요.

반구대(盤龜臺) 생각이 자꾸 나요. 왜 거 울주에 있는, 유명한 암각화가 있는 곳 말이에요. 거기 반구대 근방 어느 분 농장에서 77년 11월초 12기 왕위전 도전3국을 두었는데 그때 나도 따라갔었어요. 이미 두 판을 져 막판에 몰린 상황이긴 했어도 한판 정도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내심 응원했는데 183수 만에 돌을 거두더라고요.

그 길로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만찬을 가졌는데 한상 거나하게 차린 요정집이었어요. 그때 김국수 옆에 시중들던 아가씨가 손을 달달 떨며 술을 따르던 기억이 생생해. 승부에 지고 어찌 속 쓰리지 않겠습니까마는, 체념과는 분명 다른 달관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 술을 받아마시던 김국수를 보고서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아아, 이제는 어렵겠구나. 여기까지구나 싶더라고. 그때가 마지막 불꽃이었던 거 같아요.” <계속>

▲ 77년 울주군 반구대에서 둔 12기 왕위전 도전3국. 김인시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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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피디엠|2023-10-02 오전 9:10:00|동감 1
동감 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는 소중한 것입니다!
제주도조천|2023-10-01 오후 10:26:00|동감 0
동감 댓글
technozks님... ---우리의 바둑전사들이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총 출동하여, 적군과--- 누가 적군이요??? 상대 사
범들이 다 적군이요??? 님은 진정 바둑을 사랑하는 분이 아닙니다.. 저도 우리 사범들이 지면 짜증납니다... 그러나 님과
같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바둑을 좋아하는 한사람으로서 여러나라의 모든 사범들을 존경합니다.. 제 기준으로 님은 반
성하시던가 아니면, 바둑세계에서 끊임없이 적이나 찿아 다니세요.....
reply technozks 흠....님은 낭만적이시네요. 그러나 현실에서의 바둑은 낭만이 아닌, 승부를 겨루는 경기이며,
더구나 아시안게임 같은 국가대항전은 꼭 이기라는 강한 마음의 표시입니다.
2023-10-02 오전 3:46:00
제주도조천|2023-10-01 오후 10:13:00|동감 0
글쓴이 삭제
시인의편지|2023-10-01 오후 7:31: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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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명절 연휴를 기하여 특집기사를 게재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둑사 방면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바둑동네 최고의 문장가 정용진 선생의 기사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이만저만한 행운이 아니지요. 바둑사에 대한 여러 가지 ‘逸話’는 언제나 열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reply technozks 오해가 있으신데...특집기사를 연재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는 오히려 연구비를 주고 권
장해야 하겠지요. 다만 여기서 지적한 것은 시급성과 시의성이 중요한 <메인뉴스>보다는
오로메뉴 중 <칼럼>폴더가 있으니 거기에 올리라는 것입니다. 위의 특집칼럼은 시간을 타
투는 긴 급보도가 아니므로, 칼럼폴더에 올려 놓으면, 관심있는 분들이 시간이 날때 보실
수 있게 말입니다. 지금 시점에서의 바둑팬들은 아시안게임 바둑전사들의 열전에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메인뉴스에 칼럼을 올리려면 <시의성> 있게 아시안게임 바둑이슈에
대하여 올렸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2023-10-02 오전 5:48:00
reply 시인의편지 제 짧은 소견이지만 기획 특집기사는 메인에 싣는 것이 맞고요. 아시안게임 관련한 바둑 소식도 메인에 계속 올라오고 있지 않나요? 특별히 문제될 게 없는데요? 추석 보너스라고 생각하세요.
2023-10-01 오후 8:33:00
reply technozks 님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 시점에서 아시안게임은 당연히 <메인뉴스>에 올라와야 하
고요. 1,2회로 끝나는 것이 아닌, 계속 연재되는 칼럼은 시간을 다투는 긴급보도가 아니므
로 오로 메뉴에 있는 <칼럼폴더>에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칼럼폴더에 가시면
훌륭하고 수준높은 칼럼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 나실때 가서 보세요
2023-10-02 오전 5:49:00
reply 서민생활 저는 칼름폴더에 올리기 전에 메인뉴스에 올려서 연제를 하고 연제가 끝나면 칼름폴더로 옮겨서 올리는 것이 바
람직 하지않냐 라고 생각합니다. 오로 뉴스에서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서 관심이 더 있으면 칼름 폴더로 옯겨가
지 않겠습니까....
2023-10-02 오전 9:16:00
reply technozks 서민생활님의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수많은
칼럼을 메인뉴스에 다 올리다 보면 메인뉴스의 고유기능(시급성, 시의성) 역활이 떨어질
수 있으며, 독자들도 혼란스럽고 짜증이 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느분 칼럼은 올리고, 어
떤분 칼럼은 안올리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문에 오로에서도 메뉴창에 <칼럼폴더>를
별도로 구분해 놓은 것이 아닐런지요?
2023-10-02 오전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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