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창호가 지난달 응씨배 4강전에서 ‘떠오른 권력’ 박정환한테 무너졌다. 조훈현은 “창호가 지니까 마음이 아팠다. 실력보다는 체력과 정신력에서 젊은 기사들을 당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 조훈현의 프로 데뷔 50년 인터뷰 중(한겨레 10월 7일자)

지난 9월 벌어진 제7회 응씨배 준결승 3번기. 체력적인 부담이 있기에 이창호 9단도 첫 판이 승부라고 생각했다. 1국을 이겨야 해볼만 한 승부가 된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서로 4점의 벌점을 받으며 벌인 9시간의 사투 끝 승자는 젊은 강자 박정환이었다. 국후 숙소에 들어간 이창호는 거의 탈진상태였다. 이날도 기절하듯 쓰러졌다는 후문이 나왔었다.

스포츠화된 현대바둑, '체력이 곧 실력?'

바둑은 '기예'인가 아니면 '스포츠'인가? '작품을 남기는 것'과 '승부를 겨루는 것'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다. 딱히 정답을 따질 수 없는 문제지만, 일단 한국기원은 바둑을 '스포츠'로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예술가들은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가치 있는 작품을 남긴다. 반면 스포츠 선수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점점 성적이 저하되고 결국 은퇴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어린 선수들이 더 활개를 치는 현재의 바둑은 '스포츠'에 가깝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바둑은 기타 스포츠와는 다른 특성이 있다. 다만 시간제한을 두는 현대바둑에서 체력적 한계는 인간의 노력으로 지연은 할 수 있더라도 완전한 극복은 어려운 문제다. 통계적으로도 대부분의 바둑 대회 우승자 나이대가 20대 초반에서 중후반까지인 것을 보면 나이에 따른 집중력 저하는 곧 성적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올해도 애타게 이창호의 부활을 고대했지만, 결국 '왕의 귀환'은 없었다. 매번 나오는 이야기지만, 나이에 따른 체력문제와 집중력저하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올해 7월의 농심신라면배 예선은 결승에서 신예 초단 이동훈에게 패했고, 11월 벌어진 GS칼텍스배 예선은 첫판에 만난 진시영에게 졌다. 이제 이창호의 예선탈락이 새로운 소식이 아닌 세상이다.

2011년 3월 국수타이틀을 잃으며 시작된 무관(無冠)의 세월은 2년째로 접어들었고, 올해는 세계대회 10연속 준우승(2005년 춘란배 이후, 중환배 우승제외)과 응씨배 탈락이라는 아픔도 있었다.

▲ 이창호 9단의 연도별 대국수와 승패기록- 승패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 한해 100국이상의 대국을 했던 해는 89년과 93년의 112국, 96년의 111국으로 총 3번 있었고, 다승순위는 88년부터 00년까지는 항상 1, 2위를 다퉜다. 이창호의 전성기는 역시 90년대였다.

다승순위는 50위로 역대 최저

올해 이창호 9단은 입단 후 가장 저조한 승수를 기록했다. 이창호는 매년 말 집계되는 다승순위에서 대부분 1, 2위에 랭크되었고, 10위권 밖의 외출은 극히 드물었다.

86년 프로기사로 입단한 해(11승 3패)는 대국수 부족으로 순위에 들지 못했지만, 다음 해인 87년 5위, 89년부터 93년까지 1위를 유지했고, 이후 상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작년 13위가 최하위기록이었지만, 올해는 무려 50위로 뚝 떨어졌다. 2010년 승률에서 56%까지 내려앉은 적은 있었지만 이때도 다승순위는 11위는 유지했다.

이창호의 올해 전적은 55전 32승 23패. 승률 58%다. 2012년 12월 한국랭킹은 이지현과 나현의 앞뒤에 끼인 14위를 기록했다.

▲이창호 9단의 역대 승률 - 입단 후부터 꾸준히 7~80% 승률을 유지했지만 완만한 하락세가 이어졌다. 최근 2010년과 12년에는 50%대의 가장 저조한 승률을 나타냈다. 최고승률은 88년의 88%였다.

올해 이창호는 2월 중순에 열렸던 LG배 결승 3번기에서 중국의 장웨이제에게 0-2로 패했다. 이어 벌어진 농심신라면배에서는 최종 주장전에 나서 셰허 9단에게 막혔다. 정상복귀를 노렸던 응씨배 준결승에서도 박정환 9단에게 0-2로 물러서며 '가을의 전설'을 만들지 못했다. 그 외 각종 기전 본선에서 올해는 16강 이상의 진출이 없다.

이창호의 '우승아지트'였던 LG배(최다우승기록 보유)에서의 패배. 특히 철벽수비의 상징이었던 농심신라면배에서 무너진 점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LG배 결승1,2국 뉴스제목에는 공통으로 '대마가 잡혔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최고의 안정감을 자랑하던 그 이창호는 이제 보기 힘들다.

'승부' 이후

한국바둑리그에 참가했던 스마트오로의 해단식에서 조훈현 9단(스마트오로팀 소속)은 만찬 중에 '내가 지금쯤 전성기였으면 엄청 벌어들였을 텐데 말이야'라는 농담을 던졌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바둑계 인사가 '상금은 적었지만, 조국수님은 롱런하지 않으셨습니까? 요즘은 장기집권은 힘든 시대입니다.'고 말하자 조국수도 '그런가?'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절대강자가 철권통치하는 영웅의 시대는 지나갔다.

역대 타이틀 획득기록(한국기원 홈페이지 기준)을 보면 조훈현 158회, 이창호가 140회, 이세돌이 45회 정도다. 현재의 1인자 이세돌도 과거 조훈현, 이창호처럼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다. 예전처럼 '싹쓸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화가 저무는 시대를 경험하는 것이 썩 내키진 않지만, 이창호의 물러섬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 영웅이었던 박찬호는 은퇴해도 여전한 '박찬호'다. 마찬가지로 성적이 조금 하락한다고 해도 이창호의 상징성은 바둑사에 영원할 것이다.

이창호 9단도 이제 내년이면 한국나이로 서른 아홉이다. 프로기사는 평생 승부의 업을 지고 산다. 끝없이 승부는 반복되고, 새 판이 계속 이어진다. 팬들도 이제 피를 토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의 무리한 대국을 바라진 않는다.

이창호 본인은 인터뷰에서 “(나이는)열심히 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면 극복할 수 있다. 준우승이 이어지고 있는 건 솔직하게 말해 괴롭다. 열심히 하면 다시 우승을 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물론 내년의 성적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사실 후지사와나 조훈현의 케이스와는 다르게 기풍상 정밀한 끝내기를 장점으로했던 이창호가 30대 후반까지 정상권에 서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제2의 전성기, 화려한 기풍변화, 최정상으로의 부활이 내년부터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바둑팬이 열광하고 중국기사들이 존경했던 근원에 오로지 성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동안의 영광을 되돌아보며 여유를 찾고, 바둑을 넘어선 인격으로 팬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승부만을 위해 산 20년이 있었던 이창호이기에 이런 바램을 말할 수 있다. 덧붙여 2013년은 혹시 '신화'가 없더라도 무엇보다 건강한 이창호를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