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12월 4일, 당시 20대의 나이에 일본바둑 일인자로 우뚝 선 린하이펑 9단이 동아일보 초청으로 방한해 조남철시대를 무너뜨리고 한국바둑을 석권한 김인 9단(25세)과 한일정상대결을 펼쳤다. 그때만해도 한국바둑이 한수 아래로 취급받던 시절, 과연 대국결과가 어떠할지 온통 관심이 집중되었다. 55년 만에 이 대국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안영이 선생이 풀어놓았다. <사진자료/월간바둑>
이 글은 [월간바둑]이 2023년을 맞아 기획한 '바둑계 원로에게 듣는다'- 안영이 선생 육성증언 1편으로, 특별히 설연휴 기간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2회에 나눠 공동게재합니다. 안영이 선생의 육성증언은 [월간바둑] 신년호(1월호) 특집으로 시작하여 3~4회에 걸쳐 순차적으로 소개되니 더 많은 바둑계 비화를 듣고 싶은 분께서는 매달 25일에 발행하는 [월간바둑]에 관심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註
안영이(安玲二)는 누구인가?
- 한국 유일무이한 ‘바둑컬렉터’이자 ‘바둑서지학자’.
- 1934년생.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바둑] 편집부(1967~1972년)에서 기자로 활약하다 편집차장으로 퇴사.
- 1965년 경우당(景友堂)에서 발행한 <월간바둑> 창간을 시작으로 모두 4종의 월간바둑잡지 창간과 제작.
- 바둑출판사 <현현각>을 세워 국내 바둑출판문화 발전에 기여.
- 지금까지 60년간 한국바둑 유물과 사료를 수집, 발굴, 보존하며 한국바둑사에 대해 연구를 거듭한 산증인.
■구술/ 안영이
■구성/ 정용진
이 분은 보노라면 일제강점기에 민족 문화재를 온몸으로 지켜낸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국보급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쓰고,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던 시절 5000원으로 그림 한 장을 사고 2만 원으로 도자기 하나를 사던 이상한 남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그 일에 묵묵히 일생을 바친 사람. 그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모으지 않았다면 우리의 보석 같은 문화재는 어떻게 되었을까?
바둑계에도 간송 같은 인물이 있다. 안영이(安玲二) 선생이다.
경성 대부호의 아들로 물려받은 10만 석의 재산을 일평생 문화재를 수호하는 데 사용한 간송과는 달리 안영이 선생은 적수공권(赤手空拳)인 처지였다. 그럼에도 일찍이 뜻한 바 있어 우리 바둑도서와 유물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바둑이라면 ‘노름’ 문화로나 취급하던 시절이었다. 바둑관련 도서나 사료를 구입하는 데 벌이를 탕진하는 사내에게 일가를 이루는 꿈은 애초 호사였다. 결혼도 포기한 채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도(전해지지도) 않았거니와 이마저 천대받고 하잘 것 없는 것쯤으로 취급해 거의 버리다시피 한 바둑문화재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일부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인류가 탄생하고 강물처럼 도도한 시대를 흘러내려오면서 저마다 주어진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교직한 것이 인간사라면, 이러한 인간사를 기록하고 보존한 것이 역사다. 이 과정에서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수집가다. 가령 미술사를 보자면 컬렉터의 역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실감할 터이다. 어느 분야이건 역사와 문화의 발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타쿠’ ‘마니아(mania)’의 열정에 기댄 바 크다.
서지학(書誌學). 한마디로 도서(圖書)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책에 대한 조사, 분석, 비평 등 고증적 연구와 분류·해제(解題)·감정(鑑定) 따위를 포괄한다.
한국바둑계에서 주저 없이 ‘바둑컬렉터’이자 ‘바둑서지학자’로 인정하는 딱 한 명이 바로 안영이 선생이다.
1934년 생으로 새해 들어 89세,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니 만큼 관절이 닳아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 말고는 고맙게도 건강하시다. 바둑계에 투신한 것이 1965년 '경우당(景友堂)'에서 첫선을 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바둑>지 기자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니 한국 현대바둑사 반세기를 온전히 겪은 산증인이다. 경우당에서 낸 <월간바둑>은 1967년 한국기원에서 <棋界(기계)>란 제호로 창간해 두 해 뒤 ‘바둑’으로 바꾼 오늘날의 [월간바둑]지와는 별개의 잡지였다.
▲ 2015년 11월 열린 한국현대바둑 70주년 특별전시회에서 안영이(오른쪽에서 세번째) 선생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순장바둑판을 한국기원 홍석현 총재(당시)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출처/ 강진일보>
‘바둑계의 간송(澗松)’ 안영이 선생
‘안영이 컬렉션’ 없이는 꿈도 꾸지 못할 바둑박물관
선생이 소장한 장서만도 4000권에 이른다. 2015년 11월 인사동에서 ‘위대한 여정’-한국현대바둑 70주년 특별전시회를 열 때 엄선해 공개했던 소장품만 406점이었다. 댁 여기저기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어 정확하게 정리해둔 목록이 없다. 여기에 좁은 거실에 보관하고 있는 순장바둑판만 20여 개다.
현업에서 손을 뗀 지 오래이고 그나마 근력 있을 때 조금 쥐었다 싶은 돈은 족족 바둑사료, 유물을 구입하는 데 썼으니 노후가 풍족할 리 없다. “그러니 이렇게 독거노인으로 살고 있지요”라며 웃음 짓는 너머에 자신의 손으로 한국바둑의 심지를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는 자부심이 엿보인다. 가난한 살림에도 단 한 점의 소장품도 팔지 않은 뚝심은 이러한 자부심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집안 곳곳, 이층 삼층 켜켜이 쌓아놓은 도서와 소장품들로 거동할 공간조차 밭다. 선생댁을 방문해 이러한 현장, 현실을 막상 대하고 나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프로와 아마추어 양쪽을 떵떵거리며 관장하는 단체가 둘씩이나 존재하지만 그 흔한 컨테이너 박스조차 하나 제공해 드리지 못한 채 오롯이 일개인에게 바둑의 역사를 온전히 떠안겨온 세월이 속상하다.
도쿄 일본기원에 들어서면 지하에 박물관(전시관)이 있다. 으리으리하게 건물을 올린 중국 항저우기원에서도 고대광실(高臺廣室) 같은 전시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기원 사무국에 김옥균바둑판과 자료 몇 점이 초라하게 나열돼 있을 뿐이다.
현대바둑 60주년이건 70주년이건 안영이 선생 컬렉션이 없으면 전시회 자체를 계획할 수 없는 게 한국바둑의 현실이다. 가뜩이나 바둑관련 사료나 자료, 서적이며 유물이 귀한 데다 이조차 다 사라져버린 마당이다. 그간 선생의 열정과 노력이 눈물겹도록 값질 수밖에 없다.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마냥 천운(天運)에 가깝다. 사정이 이만하기에 한국기원이건 지자체건 박물관 건립 얘기가 나올 때면 선생의 소장품 인수는 옵션이 아니라 전제조건이었다.
우리바둑 역사, 그 중 순장바둑 발굴과 연구에 힘을 쏟았던 선생은 바둑계에 굵직한 사실(査實)을 종종 알려 화제를 일으켰다. 이른 바 ‘바둑사를 바꾼 안영이 선생의 발표’다.
- 1992년 4월, 김옥균 기보 발굴
- 1996년 10월, 일본 정창원(正倉院)이 소장하고 있는 ‘목화자단기국’의 출처가 한국(백제)이라는 사실을 발표
- 1997년 1월, 17줄 시킴 천 바둑판을 소개하며(현지 답사 후) 순장바둑의 인도기원설 제기
- 1998년 3월, 일본자료를 찾아 조남철 첫 공식대국 기보 발견 후 소개
- 2000년 10월, 국내 최고의 돌바둑판인 월남사지바둑판 발굴
- 2000년 10월, 신안바둑판이 21줄 바둑판이라고 주장
컬렉터, 서지연구자란 이런 사람이다. 선생의 집 서랍 곳곳에서 꺼내는 자료는 지하에 묻혀버린 화석이 아니다. 그날의 시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행적을 퍼즐 맞추듯 되살리는,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다.
▲ [월간바둑] 2005년 8월호에 평생 모은 비장의 바둑유물을 소개한 바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바둑계 최초로 공개하는 김인 국수의 ‘기사 사퇴서’
평범한 물건이 역사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란 책을 보면 ‘일기장, 엽서, 영수증, 사진 등은 쓸모를 다하면 쓰레기가 되지만 시간을 견디면 문화재가 된다’고 말한다. 더 늦기 전에 선생의 육성을 담기 위해 상도동 댁을 찾았을 때 ‘시간을 견디면 문화재가 된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증언과 물증을 실제 접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무슨 들을만한 말이 있다고 바쁜 분들이 이렇게까지 걸음하셔요 그래. 그냥 전화로나 몇마디 하는 걸로 그만일 밑천이구만…. 이미 오래전 바둑계를 떠난 변방의 필부(匹夫) 얘기야 별것이 없고 재미도 없을 것이니, 기왕 어려운 걸음들 하셨으니 독자들이 관심 있을만한 일화 하나는 들려드려야 쓰것네.”
그러면서 일행에게 보여주고 들려줄 욕심으로 어젯밤 이곳저곳을 뒤져 겨우 찾았다는 원고지 석 장을 내놓았다. 누렇게 탈색된 원고지는 세월의 더께가 흠씬 묻어났는데, 맨 위에 누군가 손수 ‘사퇴서’라고 쓴 필적이 김인 국수 것이라는 걸 아는 순간, 기절초풍할 뻔했다.
▲ 55년 만에 안영이 선생이 공개한 김인 국수 친필 '한국기원 기사 사퇴서'. 이에 얽힌 선생의 증언이 또 한 편의 한국바둑사다. 그날의 역사를 날것 그대로 다시 불러세워 들려주는 놀라운 증거였다.
김인 국수가 한국기원에 사직서를 쓴 적이 있다는 얘기는 생판 처음 듣는 말이고 그것이 1968년 12월 4일 세종호텔에서 린하이펑(林海峯) 9단과 기념대국을 앞두고 자신의 심정을 밝힌 내용이었다는 사실에 더 비장했다.
사퇴서
본인이 한국기원 소속기사가 된 지 10년 그간 한국기원에서 행하는 모든일에 소속기사로서 무조건 노력하고 순응해 왔읍니다.
또한 한국기원에서도 항시 기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모든일을 원만히 이끌려고 노력하여 주신 점 대단히 감사히 생각하고 있읍니다.
불행 이번 林海峰氏의 내한은 참으로 뜻깊게 생각했읍니다만 본인과의 대국치수 문제로 인하여 한국기원에서 본인에게 바라는 뜻에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무릇 현대기전에서 신문타이틀이나 모든 행사가 단을 막론하고 핸디캡을 갖지 않는 기전으로 지향해 가고 있는 걸로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일은 국제간의 친선이며 마침 본인이 국중(國中)의 몇 개의 타이틀을 갖은 터로 본인의 신상에야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타이틀에 대한 불명예를 끼치게 된 걸로 생각합니다.
이번 대국에는 한국기원에서 바라는 뜻에 응하여 대국을 하겠읍니다만 모든 것이 본인의 실력부족에서 오는 탓으로 생각하며 자격지심에서 한국기원 소속기사를 사퇴하겠습니다.
선처 바랍니다. 한국기원 귀하.
- 12월 3일 6단 김인 드림
▲ 1969년 1월호 [월간바둑]에 실린 린하이펑 9단. 일본바둑 일인자의 방한은 대단한 뉴스였다.
사연은 이렇다. 1968년 12월 2일, 린하이펑 9단이 동아일보 초청으로 방한했다. 린하이펑은 12세에 입단해 25세(1967년)에 9단이 된 중국 상하이(上海) 출신 천재기사다.
당시 [월간바둑] 관전기를 보면 린하이펑 9단을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귀한 손님’으로 표현할 만큼 한국에서 얼마나 대단한 기사로 바라보고 있는지 절절히 드러난다.
우리 기계(棋界)로서는 해방 후 처음으로 귀한 손님이 왔다. 4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본인방(本因坊)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林海峯 九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중국출신의 전문기사로 八단(64년) 시절에 명인(名人)이 된 후 3기 연속 타이틀을 보유하였으며 사상 최연소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혜성과 같이 나타나 ‘면도날’ 사카다(坂田榮男) 천하를 무너뜨리고 단숨에 20대 명인·본인방 시대를 연 린하이펑 9단이 방한해 우리나라 최고기사인 김인 六단과 두 차례 친선대국을 치른다는 건, 요즘으로 치면 메시나 호날두가 날아와 팬들 앞에 뛰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은, 아니 그 시절을 헤아린다면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25세의 국수, 김인이 하얗게 밤을 새며 사퇴서를 쓴 까닭
일개 기사 김인은 질지언정 한국의 국수, 한국바둑이 져서는 안된다!
1968년은 관철동에 한국기원 5층 회관을 준공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바둑이 비로소 터전을 마련하고 중흥기를 맞이하는 기운에 넘칠 때였고, 9개 기전 중 김인 6단(당시)이 국수를 위시해 7개를 휩쓸고 있는 시기였다. 이 무렵 김인은 명실상부한 한국 일인자로 무적에 가까웠다. 그해 새로 생긴 명인전 결승에서나 조남철 8단(당시)이 김인을 이겨냈을 뿐(이조차 단판승부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것) 여타 기사들은 현격한 실력차이를 보였다. 국내 선수층이 엷었고 일본바둑을 메이저리그로 인정하고 있던 시절이기는 했다.
그렇기는 하나 한국의 7관왕 김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도 린하이펑 九단과 같은 20대 기사였다. 1942년생 린하이펑이 26세, 김인이 25세로 승부사로서 패기 펄펄 넘쳐나는 나잇대다. 린하이펑이 일본바둑을 대표하는 본인방(本因坊)이라면 자기는 엄연히 한국바둑을 대표하는 국수(國手)다.
게다가 두 기사는 김인이 일본 유학시절 오타케(大竹英雄, 42년생)와 더불어 언론에서 세 명의 이름을 따 ‘김죽림(金竹林)’ 트리오가 도래할 것이라 전망했던 일원이다. 2년이 안 돼 한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본기원에서 당당히 3단으로 인정한 기사였고 상당히 촉망받던 신진기수였다. 이런저런 정황을 차치하더라도 자고로 승부사란 “언제나 나도 한칼 있다!”는 배짱으로 링에 오르는 존재 아닌가. 그런데 링에 오르기도 전에 승부욕을 꺾어버리는 결정을 한국기원 이사회에서 해버렸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 5단시절, 조남철 8단에게서 '국수'를 뺏으며 한국바둑 정상에 올랐을 때(1966년 2월 10일) 김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20대 청년 김인의 훤칠한 모습.
린하이펑 9단은 방한 중 총 세 판의 기념대국을 두기로 했다. 한국바둑의 일인자 김인 국수와 비공개(12월 4일)·공개(12월 6일) 두 판을, 한국 명인 조남철 8단과는 공개대국(12월 7일) 한 판을 두기로 사전 조율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바둑에 경도돼 있어서인지, 스스로 그들과의 실력차이를 너무 크게 봐서인지 일본기원과 치수 협상에서 첫판(비공개, 제한시간 각 3시간)을 한국의 국수가 정선(定先)으로 두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개대국 두 판은 맞바둑(덤 4집반, 제한시간 각 30분)으로 두기로 했으면서 굳이 왜?
김인으로서는 무척 마음 상한 처사였다. 일본기원이 정선 치수를 요구한 것인지 알 길 없으나 일본 본인방에 대해 예우를 차린답시고 지레 몸을 낮춘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기원 이사진에는 승부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법한 조남철 사범님도 계셨기에 더 속상했을 것이다.
“당시는 배상연 씨가 한국기원 사무국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인데 김인은 어디까지나 소속기사일 뿐 모든 건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야하는 게 기단의 분위기, 흐름이었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일본에 한수 처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어요. 거기에다가 일본에서는 어디까지나 김인은 三단이었고 린하이펑은 저만큼 앞서가는 九단이고…, 단(段)의 권위에 엄격했던 시절이었으니 아무래도 단 차이를 생각했겠죠.”
김인이 사퇴의 변을 작성한 날짜가 12월 3일이다. 세종호텔에서 비공개 대국을 앞둔 기사가 전날밤 컨디션 조절을 뒤로 한 채 작성했다는 얘기다. 사퇴서야 전날 썼겠지만 치수를 통고받은 그 순간부터 고심하고 또 고심한 끝에 밤을 지새우며 담았을 내용이다.
어린시절부터 진중하고 신중하기로 정평난 그다. 원고지 석 장에서 이 대목, “특히 이번 일은 국제간의 친선이며 마침 본인이 국중의 몇 개의 타이틀을 갖은 터로 본인의 신상에야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타이틀에 대한 불명예를 끼치게 된 걸로 생각”한다는 말은 다시 풀어쓰면 이와 같다.
1) 친선대국이긴 하나 국가 간 한국기원과 일본기원의 명예를 건 승부이며 따라서 정선 치수에도 질 경우 한국기원의 자존심을 실추시키는 일이므로 사전에 한국기원 소속기사 신분을 사퇴하고 두어 김인 일개인의 패배, 굴욕으로 의미를 그나마 축소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2) 국중(우리나라 9개 기전 가운데 7개)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기전의 권위와 개최사(후원사)의 명예까지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김인의 항변은 이런 식이다. 풍류와 선비기질이 뼛속까지 흘렀던 그는 제아무리 상대방의 처사가 불편하고 부당해도 직선으로 맞받아치는 법이 없었다. 칼을 겨눠도 차라리 자기 쪽으로 향했고 자신을 희생하는 쪽으로 의중을 전달하는 식이다. 그랬기에 언제나 그의 목소리는 묵묵했으되 오히려 더 묵직했다. 한국기원 소속기사 신분을 포기하고 싸우겠다는 건, 이를 테면 이사진의 처사에 대한 우회적이면서도 강력한 항의표시인 셈이었고 이 한 판에 프로기사 생명을 걸고 싸우겠다는 배수진(背水陣)이기도 했다.
양국 기원 간의 약속이고 이미 잡힌 대국이니 공인으로서, 승부사로서 최선을 다해 두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두기 전에 이러한 나의 뜻을 사퇴서에 담아 전달은 하고 가겠다. 대국 전날 이런저런 상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한국 국수 김인은 하얗게 밤을 새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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