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手 김인의 처음과 끝에 서 있었던 사람, 안영이!
國手 김인의 처음과 끝에 서 있었던 사람, 안영이!
안영이 육성증언 (3) 김인과 안영이의 운명 같은 인연
[기획/특집]
  • 정용진|2023-09-28 오후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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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바둑의 레전드 김인 국수의 바둑 시작점에 서 있는 사람이 동향선배 안영이다. 국수 김인이 떠나는 날에도 안영이 선생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운명이자 숙명 같은 거였다. 두 사람의 사연을 옮겨적으니 곧 한국 현대바둑사였다.

이 글은 [월간바둑]이 2023년을 맞아 기획한 '바둑계 원로에게 듣는다 - 안영이 선생 육성증언‘입니다. 올초 설연휴 기간 1,2회 게재한 데 이어 나머지 원고를 이번 한가위 연휴에 연재합니다. - 편집자 註



안영이(安玲二)는 누구인가?
- 한국 유일무이한 ‘바둑컬렉터’이자 ‘바둑서지학자’.
- 1934년생.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바둑] 편집부(1967~1972년)에서 기자로 활약하다 편집차장으로 퇴사.
- 1965년 경우당(景友堂)에서 발행한 <월간바둑> 창간을 시작으로 모두 4종의 월간바둑잡지 창간과 제작.
- 바둑출판사 <현현각>을 세워 국내 바둑출판문화 발전에 기여.
- 지금까지 60년간 한국바둑 유물과 사료를 수집, 발굴, 보존하며 한국바둑사에 대해 연구를 거듭한 산증인.

■구술/ 안영이
■구성/ 정용진

○● 안영이 육성증언 (1편)/ 일본 본인방에게 ‘정선’으로 두라는 통고에 한국 국수는 ‘사퇴서’를 썼다! ☜ 먼저 보고 오기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2편)/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국수 김인의 사퇴서에 담긴 임전자세 ☜ 먼저 보고 오기 클릭



나그네와 같은 우리가, ‘인생 길‘을 얘기할 때 흔히 읊는 시(詩)가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국수(國手) 김인 九단(1943~2021)이 작고할 때까지 그의 고향 강진에서는 매년 늦가을이면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대회’를 열었다. 취재를 갈 때마다 국수님을 좌장으로 모시고 술자리를 갖곤 했는데 말석이나마 운 좋게 끼어 이런저런 과거 바둑계 이야기를 귀동냥할 수 있었다. 2015년인가 한잔 거나했을 때 “까까머리 어린시절 고향 강진에서 어떻게 바둑에 빠지게 됐는지”를 여쭸고 그때 프로스트의 시가 절로 떠오르는 옛날얘기를 들었다. 그날 들은 이야기를 사이버오로에 <소년의 ‘가지 않은 길’, ‘운명의 길’>이란 제목을 달아 보도한 적이 있다.

가지 않은 길
소년의 아버지는 강진읍장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읍장관사로 가는 길은 두 갈랫길이었다. 하나는 경찰서 앞으로 지나가는 길이었고 또 하나는 도립병원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소년은 늘 경찰서 앞길로 다녔다. 그러다 어느 하루, 왜 그랬는지 소년은 도립병원 쪽 길을 택했다. 그렇게 타박타박 걷는데 병원 앞 정자나무 아래에서 병원의사가 동네 형 한명을 앞에 앉혀 놓고 바둑을 두는 게 보였다.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병원의사는 그때 막 결혼한 신혼이었으며 동네 형아는 안영이였다. 월간『바둑』 편집차장을 지냈으며 한국의 ‘바둑서지학자’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안영이 선생이다.

이날부터 소년의 귀가가 늦어졌다. 매일 밤늦게 아이가 집에 들어오자 엄마가 저간의 사정을 수소문했고, 아빠에게 신혼 의사와 날마다 바둑을 두다 늦는다는 걸 알렸다. 얘기를 들은 아빠는 잠시 고민하다 강진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고수를 찾아 아이를 보냈다. 당시 국민학교 5~6학년 무렵의 소년은 일취월장의 진전을 보여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고, 이후 세계적인 기사가 됐다. 평소 ‘가지 않던 길’로 딱 한번 들어선 그 길이 소년의 운명을 갈랐다. 강진이 낳은 국수 김인이 바둑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다.


김인 국수의 바둑 시작점에 안영이 선생이 서 있다. 그리고 2021년 4월 6일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엄수하고 경기도 광주 시안추모공원 유택(幽宅)에 모실 때 마지막을 지킨 사람이 또 안영이 선생이었다. 선생은 거동이 불편한 것에 개의치 않고 불원천리(不遠千里) 달려와 반드시 당신 손으로 고인의 봉안함에 생몰연대를 새겨 안치하고 싶다고 유족에게 간곡히 청을 넣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취흥이 오르면 사철가(四節歌)를 한가락 뽑아대던 국수의 목청이 들리는 듯했고 산머리를 가로지르는 구름조차 느릿느릿 움직이던 그런 봄날이었다. 선생은 그렇게 애절한 마음으로 동향의 후배, 평생 막역하게 지내며 존경하던 국수와 작별했다.

▲ 김인 국수의 유골함에 생몰연대를 새기는 안영이 선생.


이렇듯 선생은 프로기사 김인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사람이다. 역으로 김인 국수 또한 선배 안영이를 바둑계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평생을 교유한 두 사람의 ‘바둑인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선생의 육성을 담기 위해 댁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듣고 싶은 얘기가 20대 젊은시절 강진에서 김인 국수를 만나게 된 대목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처럼 바둑의 길로 들어선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1934년생이에요. 호적에는 1년 늦게 올려 35년생으로 나오고요. 그래도 김국수(1943년 11월 23일생)보다 여덟 살 연상입니다. 그러니까 김국수 입장에서 그때 내가 ‘동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만고만한 형아’가 아니라 아저씨였거나 삼촌뻘 형님인 셈이죠. 김국수와 생일이 똑같은 내 조카도 있었으니까요. 이미 이십대 청년으로 면에서 서기 노릇을 한 6개월 하다가 강진도립병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김국수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초등학생 때가 아니라 중1 때인 걸로 기억해요. 내가 1953년 6월 도립병원 발령장을 받고 그 이듬해였으니까 54년 여름이었을 겁니다. 김국수네가 아들만 넷이고 꼬바리(막내)가 여자애였는데 그 집 4형제를 내가 잘 알죠. 제일 큰형이 초등학교 1년 후배였고, 그렇게 형들은 알고 있었는데 넷째아들인 김국수는 도립병원에서 바둑을 두면서 처음으로 얼굴을 익힌 거죠. 당시 김국수 아버지 김용훈(金溶熏) 씨가 강진읍장이어서 관사에 살 때였어요.”

초등6 때 입문, 중2에 상경해 유학

강진읍 서성리에서 태어난 김인은 우리나이 열한 살 무렵 셋째형님(김영곤)에게서 바둑을 배웠다. 지금으로 치면 늦은 나이에 입문한 편이지만 그 시절은 이 나이에 바둑을 배운 게 신기할 때다.
김국수가 六단 때 쓴 1967년 월간『바둑』 10월호 <나의 데뷔> 내용을 보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셋째형님한테 25점을 놓고 바둑을 배웠고 1년 후(중1)에는 부쩍 늘어 8급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김국수 입으로 바둑을 처음 접한 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고 하니(중학교에 입학한 해가 54년이니) 1953년에 배웠다는 얘기이고, 이로 미루어 우리나이로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말이 된다.

바둑공부를 하러 상경한 시기도 여러 경로로 교차확인해 보니 중학교 1학년이 아니라 2학년으로 진급하던 봄, 55년 3월이 정확하다. (이전에 “당시 국민학교 5~6학년 무렵의 소년은 일취월장의 진전을 보여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고, 이후 세계적인 기사가 됐다”고 썼으나 시기가 틀렸다. 이 기회에 바로잡는다.)

“아마 54년 여름방학 때였는지 그 무렵 '배다리'라고…, 냇가 배가 다리대신 사람을 태워 왔다갔다 해준다고 해서 배다리라고 불렀는데 그곳이 목욕하기 좋은 장소에요. 도립병원에서 한 1.5킬로미터 떨어진 거기서 김국수가 동기들과 더불어 멱 감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근무하고 있는 도립병원 앞을 지나갔어요.

옛날 강진에는 유곽이 있었어. 당구장도 있고…. 일제시대에 큰길이 몇 백 미터 되지 않았지만 시골에 아스팔트가 깔린 길은 전국에서도 몇 없었으니 당시로서는 제법 도회지였지. 김충식이라고 강진일대에서 이 양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부자도 살았던 그런 동네였어. 왜정시대부터 있었을 법한 그 유곽자리에 도립병원이 들어서 있었어. 거길 근무하면서 토요일 오후가 되면 나무그늘 아래서 긴 평상을 깔아놓고 의사하고 바둑을 두곤 했는데 마침 그때 김국수가 친구들하고 지나가다가 구경하게 된 거야.

까까머리 네 명이 주욱 둘러서서 지켜보다가 개중 길동무 하나가 ‘얘도 바둑 둘 줄 아는데요?’라며 은근히 추천하더라고. 바둑 두는 사람이 적었던 시절이잖아요. 첫째는 룰부터 모르니까. ‘어, 그래?’ 반갑잖아요. 그날부터서 만날 밤12시에요. 김국수는 그때 바둑에 흠뻑 빠진 거야. 초창기에 나하고 그렇게 바둑 많이 둔 사람이 없지.”

▲ 아주 귀한 사진을 안영이 선생이 내놨다. 김인 국수(가운데)가 일본에서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을 때 친구들하고 찍은 사진이다. 원래가 곱상한 귀공자 스타일로 어려 보였지만 이때는 스물을 넘긴 나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이나 훨씬 동안이다. 옆에 있는 동창이 마치 아버지로 보일 정도다.


평소 ‘가지 않던 길’로 딱 한번 들어선 그 길이 소년의 운명을 갈랐다

읍장의 막내아들인 김국수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바둑에 입문한 것은 맞다. 그리고 평소 다니지 않던 도립병원 길로 들어선 건 운명을 좌우한 일이긴 했다. 하나 선생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렇다고 전적으로 ‘우연’이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읍장 아들이 배다리에서 관사로 귀가하려면 경찰서가 있는 큰길로 직통하는 게 편하고 빠르다. 도립병원 길은 경찰서 길에서 직진하다가 중간에서 굳이 꺾어 들어가야 하는 샛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굳이 샛길로 방향을 튼 것부터가 일상적이지 않았다. 선생은 약도까지 손수 그려 보이며 그때 얘기를 들려주었다.

“큰길로 가다가 이렇게 빙 돌아서 우회하는 길이거든. 거리가 더 먼 길인데 왜 그리로 왔을까. 도립병원 그 길목에 바둑을 두고 있다는 걸 김국수가 알은 거야. 읍이라 해도 좁은 동네니까 어디서 바둑을 두더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고 봐. 그 나이에 어떻게 배웠는지 바둑을 상당히 둘 줄 알았어. 그랬으니까 당연히 관심이 있었겠지.”

▲ 선생이 그려 보인 당시의 강진도립병원 위치.


생전 김국수는 샛길로 빠진 것이 어쩌면 운명이었다 했지만 형님한테 바둑을 배워 둘 줄 알았기에 내심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67년 월간『바둑』에 쓴 <나의 데뷔>에서도 형님에게 바둑을 배우고 1년쯤 뒤 8급까지 실력이 붙었을 때 “그곳 도립병원까지 원정을 가 의사선생님들하고 바둑을 두게 됐으며 퇴근 후에는 그 분들 댁으로 가 자정이 지나도록 뒀다”고 말한 걸로 미루어 짐작컨대 어린 마음에 견줄만한 상대를 내심 고대했고 일종의 도장깨기 비슷한 걸음걸이(원정)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열 살 갓 넘긴 김국수의 기억으로는 그날 염소 풀 먹이다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안영이 선생의 기억에는 멱 감고 오던 조무래기 네 명이 있었다. (김국수와 생일이 같다는 선생의 조카에게까지 확인해 보니 선생의 증언이 맞았다.)

김국수가 프로가 된 뒤에 남긴 족적도 아니고 입단 이전의 과정,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은 행적에 대해 굳이 선생에게 여쭙고 세세히 시기까지 새삼 되짚는 까닭은 ‘눈길을 걸을 땐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어지러이 걷지 말라’는 말처럼 기록을 남기는 행위 또한 그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몇 차례 선생의 육성을 담으면서 바둑사의 산증인인 고령의 선배에게서 언제 이런 얘기를 또 들을 기회가 있을까 싶고, 어느덧 필자 또한 ‘관철동시대의 끝물’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이기에 이제는 당시의 사정과 정서에 밝은 후배도 거의 없다. 두 귀 쫑긋 세워 저인망 투척하듯 구석구석 여쭙고 확인해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랄까.

▲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 1기에서 9기까지 국수위를 제패한 '난공불락' 조남철 아성을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연 김인 국수(오른쪽). 동아일보 사옥에서 열린 시상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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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도립병원이 키운 ‘조남철 키드’, 조남철시대를 무너뜨리다

- 1950년대까지만 해도 먹고 사는 데 급급하던 시절이었고 바둑 둘 줄 아는 사람 만나기가 힘들었을 때인데 어른 둘이 중1짜리 소년을 데리고 만날 자정 무렵까지 수담을 나눴다니 좀 별일은 별일이었겠네요? 그 의사가 어떤 분인지 더 궁금하네요.

“김정호 씨라고…, 외과의사였어요. 수술을 잘해서 나중 독립한 다음에 성공하셨죠. 경상도 밀양 사람이었는데 그때 신혼이었어요. 신혼이긴 해도 낯선 지방에 온 데다 환자만 보다가 나중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인데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외국음악 듣는 것하고 바둑만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었는데 우리가 뛰어들었으니 활력이 돌았을 테죠. 저녁에는 그 양반 신혼집으로 옮겨 12시까지 바둑을 두었으니까.

의사선생은 수가 서너 점 달렸어. 그래도 바둑을 무지 좋아하고 바둑밖에 몰라. 김국수는 나하고는 엇비슷했고, 물론 나중에는 셌죠. 어리고 기재가 있으니까. 최경연(崔敬涓) 씨라고 있어. 강진 부잣집이었는데 ‘강진국수’ 소리를 듣던 일대 최고수였어요. 아마추어 초단쯤 되는 실력이었을 걸? 지금 시대의 잣대로 당시 유단자를 바라보면 안 돼. 그땐 유단자를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분한테 4급을 공인받기 위해 경쟁하기도 했어. 나중 인정받았지. 우리랑 그렇게 바둑을 두는 것을 안 김국수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그 분한테 데리고 가 좀 체계적으로 배우게 하신 걸로 알아. 겨울방학에 한달 간 배우고서 수준이 비슷해졌지 아마.”

김국수도 최경연 씨를 “젊었을 때 고명한 분에게 바둑을 배운 분”이라며 “그 분에게 이론적으로 배우기도 했지만 일본에서 펴낸 <本因坊秀哉(본인방슈사이)> 같은 많은 책을 빌려 보면서 기초적인 지식을 넓혔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시절 얼마나 귀한 바둑책인가. 고향에서 사사(師事)한 첫 스승이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던들, 또 지역유지(읍장 아버지)의 자제로 태어나지 않았던들 얻지 못했을 기회다. 이 무렵 여러 바둑책을 접한 김국수 덕에 안영이 선생도 나중 바둑출판을 하게 되고 서지학자로, 컬렉터로 자리했으니 사람의 운명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선생은 김국수가 바둑재미에 한창 빠져들기 시작한 나이(중1)에 조남철 선생이 동아일보가 주최한 우리나라 최초 신문기전인 국수제일위전(1956년)에서 우승할 때이고, 조남철의 명성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면서, 이를 테면 강진 촌구석에서 이를 보며 바둑돌을 잡은 ‘조남철 키드’가 딱 10년 뒤 조남철시대를 무너뜨린 선봉장이 된 사실 또한 재미있는 우연 같은 필연 아니겠냐며 웃음 짓는다.

▲ 2015년 한국현대바둑 70주년 특별전시회에 전시된 안영이 선생의 소장품을 사이에 두고 김인 국수와 함께. 두 사람 사이는 흡사 연리지와 같이 바둑의 연으로 얽혀 있다.


- 그나저나 그 시절 선생님은 바둑을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요?

“선친께 배웠지. 선친은 한학자셨는데 왜놈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선비로서 관계에 뜻이 전혀 없는 거야. 옛날노인들은 정부가 없으니까 선비양반들이 갈 데가 없잖아요.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셨고 오사카에서 한약방을 하시며 일본에서 쭉 살기만 했어.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사연이고 거기서 초등4년 때까지 자랐지. 어렸을 때 단련된 자연스런 일본어 발성이니까 아무래도 거기서 태어난 사람이 훨씬 낫겠죠. 내가 바둑계에서 일본통으로 활동하게 된 배경이지요.

해방되자마자 한달 후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오사카에서 돗토리(鳥取)현으로 강제 소개(疏開)돼 2년 동안 살다가 선친 고향인 강진으로 온 거죠. 일본서 살 때는 읍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거주했는데 시골서 걸어 학교에 다니려면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 그래야 학교를 원만히 다닐 수 있다 해서 선친이 나이를 한살 늦춰 호적에 올리신 거에요. 선친은 맨주먹으로 고향에 돌아와서는 6.25 직전까지 시골서당 훈장을 하셨는데 그 살림살이가 오죽 팍팍했겠습니까.

선친께선 손재주가 있으셨어요. 손재주가 좋으니까 일본에서도 순장바둑판을 만드셨어. 원래 순장바둑을 두셨어. 선친 사상으로는 일본바둑을 두실 분이 아냐. 그래서 어릴 때 나도 순장바둑을 배웠지. 24점인가 좌악 놓고 배운 기억이 나. 순장바둑을 ‘까마귀 바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 그런데 순장바둑이나 일본바둑이나 바둑 두는 법은 같으니까 쉽게 둘 수 있었고, 바둑 두는 아이가 귀할 때라 어릴 때 아이들이 “바둑이…, 바둑이”라며 별명으로 날 부르곤 했어.

지금도 눈에 선해. 해방을 맞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편에까지 선친은 일본제 바둑알에 순장바둑판을 갖고 오셨는데…, 왜 거 있잖아요? 대마도에 표착한 조선 어부들이 난민 수용소에서 바둑 두는 모습을 그린 <어부(漁夫)의 일가(一家)>를 보면 옛날에는 배편을 이용한 해상교통이 많았고, 목적지까지 며칠씩 걸리는 여행이다 보니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바둑판을 휴대하기도 했다는 것을요. 그처럼 선친도 조선이 해방됐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배편을 이용할 생각으로 바둑판을 가져오신 듯한데 어느 순간 확 바다에 버리시는 걸 봤어요. 피붙이들을 달고 빈손으로 귀국하는 길, 여러모로 심사가 착잡하셨을 테죠.”

대한해협에 버려진 바둑판과 불에 타버린 바둑판 사이

선생은 선친이 대한해협을 건너며 순장바둑판을 버린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문득 생각난 표정으로 소년 김인이 상경할 때 품고 왔으나 불에 타버린 애석한 바둑판 이야기도 덧붙였다.

“여름철 무렵에 만나서 겨우내 바둑을 두는 동안에 어른인 내가 걱정을 할 거 아냐. 어린애를 데리고 만날 두게 되니까. 해서 하루는 너 이렇게 바둑만 두면 되겠냐? 한번 생각해 보라고 충고했어요. 아마도 상경을 하는 데 내 조언도 한몫했겠죠.

한겨울을 나니 이미 최경연 씨와도 좋은 적수가 돼 있었어요. 아이가 바둑 때문에 만날 밤늦게 귀가하는 걸 안 김국수의 아버지가 지역 최고수를 소개한 데 그치지 않고 ‘아이가 바둑의 천품을 타고 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친구의 권고에 따라 그가 소개한 서울의 이학진(李鶴鎭) 선생에게 보낸 거죠.

손흥민 아버지 손웅정 씨처럼 일찌감치 유학을 시킨 셈인데 실은 그 시절 바둑에 대한 인식과 정서를 헤아려 볼 때 김국수의 아버지 입장에서 쉽지만은 않은 결단이었을 겁니다. 요즘처럼 외아들만 있는 집안이었으면 모험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봐요. 조남철, 서봉수 九단이 그랬듯 아들이 여럿이었으니까 한명 정도에게는 ‘그래 너 한번 해봐’라는 마음의 여유 같은 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바둑으로는 밥을 못 먹을 때니까.

그때 상경할 때 관사에 있던 바둑판이었는지 어떤 바둑판을 손수 안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후 불이 난 와중에 타버렸다고 합디다. 그게 남아있다면 모차르트 생가에 가면 어릴 적 손수 치고 켜던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마주할 수 있는 것마냥 바둑박물관에 전시할 유물이 되었을 텐데 참 아까워요.”

▲ 중2로 상급하던 봄, 바둑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고향 강진에서 상경했다. 그 무렵 한국기원 계단을 내려오는 김인 국수(왼쪽)의 교복 입은 모습이 마치 그 옛날 활동사진을 보는 듯하다.


1955년 이른 봄(3월)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하던 날 소년 김인은 바둑판 하나를 가슴에 안고 살던 집 곳곳을 눈에 새겨 가기라도 하듯 찬찬히 빙 둘러본 후 대문 밖을 나섰다고 언젠가 여동생이 말한 바 있다. 국수가 된 이후 쓴 글(나의 데뷔)에서도 이 바둑판에 대해 한 대목 설명하고 넘어간 걸 보면 김국수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던 판이었던 듯하다.

여기에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집에서 늘 아버님이 아껴 쓰시던 바둑판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바둑을 수업하러 가는데 그냥 갈 수가 없고 해서 아버님에게 말씀 드려 그 바둑판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수리하고 또 퇴색된 것을 다시 칠을 해서 새것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올라왔다. 지금 생각하면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 후 그 바둑판을 이학진 선생 사무실(장안빌딩-당시 이선생이 장안빌딩 내에 있는 맥주 회사에 맡겨 뒀는데) 그 건물이 불이 나는 바람에 타버렸다.

▲ 조훈현 九단 승단 축하연에서 김인 국수, 이학진 선생과 함께 자리한 안영이 선생(1982년 5월 21일 서울 코리아나호텔). 이학진 선생은 어린 김인을 돌본 선생이었다.


한 사내의 운명을 가른 사활묘수집 <棋譜>

이제 선생이 바둑 출판과 서지학자, 컬렉터로 걸음하게 된 계기, 사연을 들어볼 순서가 됐다. 소년 김인이 청년 안영이를 만나 바둑세계에 깊숙이 빠지게 된 것처럼, 이번에는 시골청년 안영이를 바둑기자로 활동하게끔 서울로 이끈 사람이 김인 국수다. 이 이야기로 전환하기 위해선 그 전에 강진도립병원 시절 이야기 한조각을 마저 해야 한다.

“그렇게 한창 바둑을 둘 무렵 김국수가 사활집을 어디선가 구해서 왔어요. 그때부터 바둑이 확 는 거야. 저희처럼 그냥 바둑만 죽어라 하고 두는 쪽하고 이론이 잡힌 책을 곁들이는 쪽하고 발전 속도에 확 차이가 날 수밖에요. 어디서 구했냐? 이거 좀 빌려주라. 닷새 말미를 약속하고선 일일이 전부 필사해 가며 도립병원에서 등사했지요.

그게 <棋譜(기보)>라는 책이에요. 1912년 광문회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본 바둑출판물입니다. 발행인은 최남선 선생이고 엮은 분이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언론인이었던 오세창 선생으로 나옵니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바둑에 관심을 기울이고 책까지 출판했다는 것은 바둑이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요.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전래되는 필사본이 많았어요. 바둑을 좋아하는 이들이 한지에 묘수 사활풀이를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어 전해져 왔는데, 중국 <玄玄棋經(현현기경)>의 ‘진롱(珍瓏)’편 같은 데서 베낀 사활집이 다수였지만 우리나라 순수 사활문제도 있었지요. 오세창 선생이 발간한 <棋譜>는 이처럼 전해온 수많은 필사본 중에서 우리나라 사활문제들로 발췌해 선보인 것이에요. 이 책을 대하고 내가 환장했잖아요. 활자로 인쇄된 사활집을 처음 대하는 거기도 하고 내용도 기가 막힌 거에요. 엄청 재미있는 묘수풀이가 다 있는 거에요.


▲ 오세창 선생이 발간한 <棋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본 바둑출판물이다.


불쏘시개로 써버렸다는 바둑 최초의 인쇄본 <棋譜>에 충격을 받고

그때 등사해 꾸러미로 엮은 걸 후일 서울로 가져와서 1965년 ‘경우당’에서 발간한 구(舊) 월간「바둑」 잡지에 연재도 하고 그랬잖아요. 바둑잡지에 취직한 그해 고향 갈 일이 생겨 그때 <棋譜> 원문을 찾아봐야겠다 싶었죠. 등사한 것으로 연재하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원본을 찾아 써야겠다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김인 국수에게 빌린 출처를 물었더니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차경모 씨 댁인가 그 동생네인가 그래요. 부리나케 찾아갔죠. 그런데 불쏘시개로 써버렸다고 그러네. 어찌나 안타깝고 속상하던지. 지금 전국에서 그 <棋譜> 소장자를 찾으면 열 권 찾기가 힘들 거에요. 아마…. 그때부터 내 손으로 자료를 하나씩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어. 65년 그때부터.”

선생은 부침을 거듭하던 초창기 바둑잡지사를 두루 거치다 한국기원 월간『바둑』 편집차장 직책을 끝으로 1974년 바둑책만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玄玄閣(현현각)]을 세웠다. 그때 사활집 <玄玄棋經>부터 냈는데, 이 또한 <棋譜>를 처음 대했을 때의 충격과 흥분, 후일 불쏘시개로 원본을 잃고서 두고두고 한탄했던 영향이 컸다.

1000만 바둑인을 부르짖는 이 시대에조차 바둑출판만으로 수익분기점을 맞추기 버거운 지경인데 바둑인구 20~30만 명 될까 말까 하던 50년 전이다. 사명감 하나로 출판사를 차리면서 웬만큼 수요가 보장되는 입문서나 기보해설집이 아닌 골치 아프고 딱딱한 사활집부터 내다니 배짱인지 객기인지. 더군다나 거의 일본책을 베껴 출판하던 시절이었다. 영세 출판사를 개업하면서 누가 이런 첫수를 둘까. <棋譜> 원문을 잃은 ‘한탄’이 선생이 일생 ‘미친 짓(?)’을 서슴지 않게 된 출발선이었던 것이다.

밀어주고 끌어주고…, 김인과 안영이의 운명 같은 인연

-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서울로 올라와 바둑잡지 일을 하게 되셨나요?

“김국수 권유와 소개로 상경하게 됐지요. 도립병원에서 한 5년 근무했는데 병원은 역시 의사들이 사는 곳이지 직원은 할 짓이 아니다 싶어 그만두고 강진 시골에서 등사 프린트업도 하고 간판업도 하고 다양한 직종으로 몇 년 밥벌이를 하고 있을 무렵 김국수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64년이었어. 지금 경우당에서 바둑 월간지 창간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기회에 한번 해볼 것을 권하더군. 바둑을 둘 줄 아는 데다 도안도 좀 하고 필서(筆書)에 밝다 싶은 내 재주를 아깝게 여겼는지, 사실 보잘 것 없는데 동향선배라 챙기고 싶은 마음이 작동했을 테지요. 하여간 당대의 국수가 적극 추천한 계기로 그해 상경했어.

실은 바둑잡지 때문에 기존 터전을 다 버리고 상경한다는 건 쉽지 않은 모험인데, 나로선 일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바둑계)는 한번 승부를 걸만한 곳이다 생각했어요. 사실 바둑잡지로 먹고 살만한 환경도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괴롭죠. 창간하고 폐간하고 파산하는 통에 여러 곳을 전전하며 부침을 겪다보니 바둑잡지를 4종이나 창간하게 됐지 뭐야…. 상처뿐인 훈장이라고 해야 할지. 하하.”

다음편에서는 우리나라 바둑잡지의 명멸 과정과 바둑전문출판사 [현현각] 탄생 비화를 따라가며 당시 승부사들과 바둑계 이야기를 들어볼 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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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정신|2023-09-29 오전 3:13: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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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이는 매력적.
빠글빠글|2023-09-28 오후 10:29: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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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잠수하던 정용진 전무이사가 드디어 필자로 등장해서 사이버오로 홈페이지를
특정인과 관련하여 <바둑계의 유일무이한 바둑서지학자이자 산증인>이라 찬양한
안영이 씨 구술을 재탕 도배하는구나.
그나저나 <안영이>는 실명인가? 그리고 학자라면 학력관련도 소개해야
신빙성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빠글빠글|2023-09-28 오후 10:13: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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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글빠글|2023-09-28 오후 7:32: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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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 입사 후 <월간바둑> 선임들이 울고 갈 초고속 편집장을 거쳐 <사이버오로>에 이적
하여 전무이사에 이르기까지 필자의 후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빠글빠글|2023-09-28 오후 5:49: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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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글빠글|2023-09-28 오후 5:44: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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