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둑 60~70년대는 가난했으되 희망이 용솟음치던 시절이었다!
한국바둑 60~70년대는 가난했으되 희망이 용솟음치던 시절이었다!
안영이 육성증언 (4) 바둑잡지 명멸의 시대
[기획/특집]
  • 정용진|2023-09-29 오후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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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上) 1967년 11월 5일 조남철 선생이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세워질 바둑회관 터에서 감격에 겨워 기공사를 하고 있다. 이리저리 셋방살이를 면치 못하던 한국기원이 마침내 자기집을 갖게 되는 순간. 아직은 가난했지만 그래도 바둑인들은 희망에 차 있던 시절이었다.

(사진 中) 미래를 이끌 새싹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63년 1월 6일 조훈현과 일본의 이시다 원생간의 국제전화대국이 한국일보 귀빈실과 일본기원을 연결해 두었다.

(사진 下) 1976년 3월 4일 한국일보사 앞에 마련한 14미터 대형자석바둑판. 일본바둑계의 떠오르는 신성 조치훈과 서봉수 명인의 전화대국 수순이 실시간 중계되었고 수많은 관중이 이를 지켜볼 정도로 바둑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이 글은 [월간바둑]이 2023년을 맞아 기획한 '바둑계 원로에게 듣는다 - 안영이 선생 육성증언‘입니다. 올초 설연휴 기간 1,2회 게재한 데 이어 나머지 원고를 이번 한가위 연휴에 연재합니다. - 편집자 註

○● 안영이 육성증언 (1편)/ 일본 본인방에게 ‘정선’으로 두라는 통고에 한국 국수는 ‘사퇴서’를 썼다!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2편)/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국수 김인의 사퇴서에 담긴 임전자세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3편)/ 國手 김인의 처음과 끝에 서 있었던 사람, 안영이! ☜ 클릭

■구술/ 안영이
■구성/ 정용진



운명(運命)과 숙명(宿命)
비슷한 듯 살짝 차이가 있는 듯.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요,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다’라고 말한다.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자기 의지에 따라 비껴갈 수도 있겠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 타고난 운명일지라도 이후 각고의 노력과 의지로 뒤바꿀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 이에 비해 숙명은 아무리 기를 써도 정해진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영이 선생과 김인 국수 두 사람의 인연은 운명이었을까 숙명이었을까.

강진도립병원에 근무하던 시절 중학생 김인을 만나 매일 밤늦도록 바둑에 빠진 것부터가 그러하려니와 그때 김인이 들고 온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본 바둑출판물 <棋譜(기보)>를 접하고서 느꼈던 경이(驚異). 그리고 이후 그 귀한 사활책이 한갓 불쏘시개로 쓰이고 만 사실을 확인했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한탄이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으니, 바둑으로 치면 ‘필연의 수순’ 같은 것일지도.

- 우리나라 초창기 바둑잡지를 제작한 산파이자 낱낱이 경험한 산증인이시니 이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듣기로 하고요, 이왕 김인 국수와의 인연에 대해 말씀하신 김에 1966년 10기 국수전 도전기에서 내리 아홉 번 타이틀을 제패한 조남철 八단(당시)을 3대 1로 꺾고 국수에 오르며 세대교체의 신호탄을 쏜 그 자리, 그 현장을 보셨을 것 같은데요.

“10기 국수전 도전기 때는 나도 상경해서 경우당 바둑지에 있었어요. 도전4국이 벌어진 그날이 정확히 1966년 2월 10일이었는데 국수위 교체가 이뤄지던 장소는 국회의원 오위영 씨의 정릉 자택이었지요. 그때 조남철 국수는 마흔세 살, 도전자 김인 五단은 스물세 살로 스무 살 차이가 있었지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랬다고, 한국바둑사에 처음으로 국수, 일인자의 계보가 바뀌던 그날 10시간의 혈투 끝에 조八단이 손을 내밀며 건넨 말이 “축하하네”였고 아마도 젊은 새 국수의 답례는 “잘 부탁하겠습니다”였을 거에요.

58년 입단하고 그때부터 조남철 국수와 일본바둑에 도전해 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매진한 결과죠.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고 풍류가의 면모가 여실했던 김국수를 냉혹한 승부세계와는 맞지 않은 로맨티스트라고 단정 지어 말하지만 그가 젊은시절 얼마나 열심히, 치열하게 공부했는지 알고 나면 그렇게 퉁쳐서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김국수가 서울 안암동 쪽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낮에 가면 바둑돌 놓는 소리가 항상 났어요.

그때는 한국바둑이 많이 약했어요. 열 사람이 일본에 가 가지고 아홉이 졌으니까 실력이 나온 거잖아요. 조훈현도 안 돌아왔을 때였으니까. 그랬기에 한국의 일인자로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원래부터 자존감이 강했던 사람이었고. 조남철 八단에게 국수를 빼앗은 여세를 몰아 그해 새로 탄생한 1기 왕위전에서도 조八단을 2대 1로 이기고 단숨에 3관왕에 올랐잖아요. 그해부터 한 10년 ‘무적 김인시대’를 열었는데, 한편 내내 한국 일인자로서 부담감도 컸을 거라고 봐. 본인도 후일 ‘당시 일인자 자리에 머무는 동안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으니까.

▲ 조남철 八단이 김인 국수(왼쪽)에게 ‘축하하네’라면서 손을 건네는 장면. 당시 동아일보(1966년 2월 11일 3면)에 실렸던 사진으로 [월간바둑]에는 처음 게재하는 역사적인 장면이다.


일인자의 부담감, 술독으로 걸어간 국수

게다가 술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했어요.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그걸 지키는 게 더 힘들다고 하잖아. 고은 시인이 노래한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이란 짧은 시도 그렇잖습니까? 목표를 세우고 올라갈 때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직진할 수 있어도 정상에 섰을 때는 또 거기대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하는 건데, 어서 부담감을 떨어버리고 싶었고 허전했던 거죠. 그것이 그를 너무 이르게 주선(酒仙)의 경지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게 한 게지. 본인 입으로 ‘좀더 바둑에 전념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으니까요.

내가 김국수와는 나이차이가 좀 있어서 술을 밤새 퍼마시지는 않았지만 엄청 친해서 술자리엔 자주 끼었지요. 옆에서 금방 알 수 있잖아요? 그런저런 김국수의 마음상태를. 하여간 그래 가지고 (술자리를 자주 가져서) 살이 많이 쪘었죠. 아르주…, 알콜 중독을 줄여서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 김국수는 아르쮸다…. 그러면 영 죽기는 싫어해서 자기 나름으로 며칠씩 술을 참기도 하는 모양이에요. 혼자서 등산을 하기도 하고. 매주 등산을 함께하는 멤버였으니까 잘 알죠.”

죽은 사람은 산에 남고 산 사람은 내려온다. 이게 인생이다. 그리하여 산사람은 또 그렇게 살아가면서 언젠가 그들을 따라 산으로 갈 테지만 그때까지 앞선 이들을 기리고 증언하고 기록한다. 이것이 역사다.

안영이 선생이 증언하는 우리나라 바둑잡지의 역사

- 김인 국수의 권유로 상경해 그때부터 바둑잡지 창간에 뛰어들었다고 하셨습니다. 1964년에 강진을 떠나 서울로 오셨지요? 50년 전, 우리나라에 제대로 잡지 모습을 갖춘 바둑 월간지가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그 시절 후하게 봐주어도 바둑인구 30만 명이 채 안되던 시장에서 몇 종의 월간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보였다 사라지곤 했지요. 그때의 분위기와 속사정이 궁금합니다.

“64년 9월에 상경해 경우당(景友堂)이란 출판사에 입사했어요. 이때는 이미 최태열 사장이 경영하는 육민사(育民社)에서 <棋苑(기원)>이란 바둑 월간지를 7월호부터 발간하고 있었지요. 64년 7월 1일 발행일자로 선보인 <棋苑> 7월호가 우리나라 최초의 바둑 월간지입니다.

▲ 육민사 <棋苑> 창간호.


잡지 값은 그땟돈 60원이었어요. 육민사가 낸 이 바둑잡지의 창간 편집장이 윤응식 씨였어요. 아시죠? 우리나라 초창기 바둑 라이터-조선일보 관전필자로 필명 백하(白霞)로 필명을 떨친 분 말이에요. 관전기를 한 장르로 개척한 분이죠.
그런데 바둑 월간지가 된다 싶으니 경우당에서 새로운 잡지 창간에 나선 겁니다. 윤응식 씨가 <棋苑> 창간호부터 쭉 하다 보니까 재미있거든. 그러니까 최태열 사장 그늘에서 나와 경우당에서 경쟁지를 낸 거야.

경우당은 ‘조선옥’을 운영하다 캐나다로 이민 간 김정학 사장을 비롯해 경복고 동문들이 중심이 돼 이끌던 출판사였어요. 김정학 사장은 진짜 바둑계에 돈을 많이 쓴 후원자셨지만 바둑잡지는 윤응식 씨가 차치고 포치고 다한 셈이에요.
그때 편집주간 윤응식 씨 아래에 시인 박재삼(후일 서울신문 패왕전 관전필자)과 최사묵 씨, 나 셋이 합류해 64년 가을부터 창간호를 준비한 끝에 그해 12월말 <바둑> 창간호(65년 1월호)를 선보인 거지. 말단으로 들어가 고생 많이 했어요. 박재삼 씨는 시인이란 프리미엄이 있었지만 바둑실력이 약해서 결국 나하고 최사묵 씨가 바둑내용에 관한 건 다하다시피 했어요.”

▲ 경우당 <바둑> 창간호.


경우당에서 65년 1월호로 선보인 <바둑>지는 현 한국기원에서 발간하고 있는 월간『바둑』지와 구별하기 위해 앞에 ‘구(舊)’를 붙여 표기한다. 바로 (舊)<바둑>지의 제자(題字)를 안영이 선생이 썼다.

제호(題號)를 쓴 솜씨에서 알 수 있듯 선생의 서체는 강진에서 군서기(郡廳 書記)를 할 때부터 ‘숨은 명필’로 알아주었다. 선생은 “선친이 한학자이고 6.25 직전까지 동네 서당 훈장을 했어도 먹고 살기에 급급할 때라 자식한테는 명심보감 정도나 떼어주었을 따름”이었고 “해서 다른 건 죄다 등 너머로 배운 수준에 불과하다”며 겸손을 보였지만, 20대 초에 임시서기로 군청 행정계에 근무할 때 다산초당(茶山草堂) 상량문(上樑文)을 쓴 일화가 그 실력을 말해준다. 서예의 대가들이 즐비한 고장에서, 그것도 다산초당 상량문을 무명의 새파란 젊은 서기가 썼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요즘 같았으면 어림없는 일일 테죠. 여기엔 감히 쓰게 된 연유가 있어요. 다산초당 그 일대에 행세깨나 하던 가문이 아마 해남 윤씨일 거야. 말하자면 다산한테 배운 제자 그룹, 그 일파가 향토에선 엄청난 세력이겠지만 관계 예산을 주무르는 건 또 공직자들이잖아요. 예산을 배정하고 집행하는 건 목소리 큰 너희가 아니라 우리 공무원이야…, 뭐 이런 심사가 작동한 거죠. 향토세력과 공직자 세력 간 신경전의 산물이랄까. 그날 중인환시(衆人環視) 리에 기어코 너가 쓰라 이거야. 그렇게 떠밀려서 쓰게 된 거죠.
한참 지나고 나중에 다산초당에 찾아가 확인해 보니까 내 글씨가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필적이 보이더라고. 대들보 위 상량문을 깎아내고 다시 자기들이 썼겠지. 아, 역시 여기, 해남 윤씨들이 얼마나 자존심 상했으면 그랬을까 짐작하고선 웃었어.”

엉겁결에 쓰게 된 상량문이었다고 하나 기본기가 없는 사람에게 붓을 들게 할 수는 없을 터. 용(龍)자, 구(龜)자 정도는 번듯하니 쓸 줄 아는 실력이라야 추천을 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보면 강진바닥에서 선생의 재주는 정평이 나 있었던 듯하다.

경우당 <바둑>지에서도 도안사(圖案士) 역할을 전담했다. 요새로 말하면 편집디자인이다. 새로운 바둑잡지가 만들어질 것이란 소식을 접한 김인 국수가 이러한 손재주에 바둑까지 둘 줄 아는 동향선배를 천거한 것은 당연했다.

재미있는 화보사진 두장

<바둑> 창간호(65년 1월호) 권두 흑백화보에는 ‘9연패의 위업 쌓은 조국수의 가정’이란 제목으로 조남철 八단(당시)의 가족사진이 실렸다. 64년 12월 3일 윤기현 五단의 도전을 3대 1로 물리치고 국수(國手)를 9연패(連覇)한 직후 찍은 사진이다. 화보 글이 재미있다.

▲ 경우당 <바둑> 창간호에 실린 조남철 국수 가족사진.


“여보 참 장하세요.” 하고 축하하는 부인 최여사 옆에서 “아빠 이번엔 뭘 사왔어요?” 하며 선물을 내놓으라고 졸라대는 막내둥이 송연 군 앞에서는 9연패의 국수가 꼼짝도 못 한다나. - 경우당이 창간한 65년 1월호 <바둑>에 실린 위 사진설명.<

선생이 잠깐 설명을 곁들이고 싶어 한 사진은 그 다음 양면에 실린 화보다. ‘당구장의 하오 0시’라고 헤드라인을 뽑아 소개한 아래 이 흑백사진은 당구를 즐기는 프로기사들의 취미생활을 촬영한 것이다. 가운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사람을 눈여겨보시라. 큐대를 들고 있는 다른 기사들의 표정과 달리 홀로 유난히 티 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싱크로(synchro率)가 맞지 않아 보인다.

▲ 왼쪽부터 윤기현 五단(당시 군복무 중이라 군복차림새. 당구실력 150), 고재희 三단(150 당구), 최종우 三단(150 당구), 김인 五단(150 당구), 김수영 三단(70 당구), 정창현 三단(300 당구) 순이다.


“삽화 같은 일러스트는 내 담당이었어. 그땐 할 수 없으니까 한 거야. 대신 전문기술이 필요한 사진취재는 일당으로 얼마씩 주고 전문가를 불러 찍곤 했어. 그런데 인화해 온 이 당구장 사진을 딱 보니까 한 사람이 자고 있어…. 쓸 수가 없잖아. 게다가 그 사람이 가장 유명한 김인이야. 할 수 없이 아이디어를 냈지.”

궁리 끝에 찾은 묘안은 합성. 웃는 얼굴을 찾아 따다가 어렵사리 붙인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뽀샵질(포토샵 처리)’을 한 사진이어서 기억에 남아있다며 선생이 웃는다. 그나저나 독자 여러분께서는 큐대를 들고 서 있는 저 파릇파릇한 기사들을 다 알 수 있으려나?
이 중 최종우 三단 이름이 낯설지 모르겠다. 나중 개명한 최창원 현 六단인 걸 아셨다면 당신은 바둑마니아 중에 마니아로 인정하겠다.

바둑 중흥의 싹이 움트는 시기였으나 두 종의 바둑잡지가 존속하기에는 시기상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바둑잡지가 탄생하던 64~65년 한국바둑계 상황은 여전히 조남철 천하였으며 뒤를 쫓는 신진기수 김인-윤기현이 五단으로 승단하면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10대 유망주 조훈현, 조치훈, 하찬석은 아직 일본 유학 중이었다.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번잡한 명동에 옹색한 채로 머물고 있을 때이긴 했으나 이 무렵 아마추어 단제(段制)를 실시해 바둑보급에 계기를 마련했고, 입단대회에 참가하는 젊은 바둑인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바둑잡지 창간이 이뤄졌다.

- 우리나라 바둑잡지 역사를 다룬 좌담회 같은 걸 보면 그때 창간호가 매진사례를 기록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당시 몇 부나 찍었나요?

제가 기억하기로, 월간바둑 잡지가 매진을 운운할 만한 판매고를 올린 적이 두어 번 있었다는데 한번이 조치훈 九단이 일본 명인을 차지했을 때(81년 1월호)이고, 또 한번은 조훈현 九단이 응씨배를 제패했을 때(88년 5월호) 정도? 88년에는 저도 월간『바둑』 말석기자였으니 급히 몇 천 부를 더 찍어 총판에 추가 공급한 사실을 목격한 바 있고요. 제가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90년대는 한국바둑의 전성기라고 하겠는데 이창호 九단을 필두로 세계대회를 판판이 휩쓸 이 때에도 3만 부를 넘겨본 적은 없었습니다.

“글쎄요, 말로야 대외적으로 100만 인구 운운했지만 그 당시 바둑인구가 내심 30만이나 될까 하면서도 그렇게 호언했을 때에요. 경우당 <바둑>지를 그때 한 2000부 정도는 안 찍었겠어요? 당시 그 정도면 많이 찍은 거죠. 1000부 가지고 어디 유지하겠어요? 물론 창간호니까 애호가들의 관심이 더 있긴 했을 거에요. 그렇지만 그 정도 바둑인구와 환경에서 독점을 해도 버거웠을 텐데 두 잡지가 경쟁을 펼쳤으니…. 결국 둘 다 비실비실 하다가 몇 걸음 못가고 통합하게 됐지요.”

- 64년 7월(호)에 육민사에서 <棋苑>을 창간했다. 우리나라 첫 바둑전문 월간지다.
- 그리고 6개월 뒤 65년 1월(호)에 경우당에서 두 번째 바둑잡지인 <바둑>을 냈다.
- 한국바둑 발전을 촉진하는 윤활유이긴 했으나 두 권은 시기상조였다. 양사는 결국 경영고를 견디지 못하고 양립 5개월 만에 통합했다.
제작비는 경우당에서 대기로 하고 판매는 영업망이 나았던 육민사가 맡는 것으로 역할을 나눴다. 제호(題號)는 육민사의 <棋苑>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양사가 새롭게 선보인 통합호가 65년 <棋苑> 6월호다.

“양쪽 편집인원을 다 정리하고 윤응식 씨가 총괄하게 됐는데 난 유일하게 생존해서 그때부터 육민사 식구가 됐습니다. 아마도 내가 월급이 싸니까, 밥값은 하니까 책상 하나 놔두고 살려둔 거 같아요. 육민사는 그동안 일본의 정석사전 시리즈 같은 바둑책을 베껴 출판할 때였어요.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바둑잡지 명맥을 유지하려 애썼어도 이듬해 66년 1월호를 끝으로, 통합한 지 6개월 만에 <棋苑>도 끝내 폐간하고 말았어.”

▲ 육민사 <바둑세계> 창간호


- 그럼 이 뒤에 잠깐 명멸했던 <바둑세계>는 어찌된 것입니까? (위 표지사진) 육민사에서 다시 선보인 바둑잡지였으니 이때에도 창간멤버였겠군요?

“<바둑세계>란 제호를 단 바둑잡지가 80년대에 ‘조치훈후원회’에서 발행한 것도 있으니까 이것도 舊<바둑세계>라고 명명해야겠네. 하여간 <棋苑>이 폐간되던 그해 10개월쯤 공백기를 거친 뒤 육민사의 최태열 사장이 너무나 아쉬웠는지 한번 더 바둑잡지를 만들었어. <바둑세계> 66년 11월호가 그것이지. 그렇지만 통권 4호째인가를 내고 이듬해 초 반년을 못 넘기고 또 폐간했어.

그렇지만 최태열 사장의 바둑에 대한 열정과 잡지제작 의지는 참 대단했지요. 그때만 해도 바둑출판이 성행한 일본에 견줘 우리는 이렇다 할 바둑 활자(活字)나 자모(字母)랄 게 없는 형편이었는데 이 분이 사재를 털어 제작하는 등 바둑 출판인쇄에 지대한 역할을 했어요. 이 분이 몇 번 바둑잡지 실패를 맛보고서 나서 ‘바둑을 좋아하고 출판을 하는 것만으로 손을 대 보았는데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이 한다는 것은 아직 무리이고 한국기원 같은 공공단체서 해야 성공한다’고 말씀한 적이 있지요.”

월간 『바둑』이 태어나려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 보다

- 그러고서 마침내 공공단체인 한국기원에서 67년 8월호 <棋界(기계)> 창간호를 낸 거군요. 2년 뒤 제호를 바꿔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월간『바둑』지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부터 제호를 <바둑>으로 하지 않았을까요? <棋界>란 제호가 순우리말이 아니어서 말이 좀 있었던가 보지요?

“그게 아니라 상표등록처럼 출판 제호도 법적 보호를 받잖아요. 경우당 <바둑> 제호가 등록말소가 안 돼 있어 쓸 수 없었어요. 그래서 등록기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2년 뒤 <棋界>를 <바둑>으로 바꾼 거에요.”

▲ 한국기원 <棋界> 창간호

▲ 2년 후 제호를 바꾼 월간 『바둑』


- 월간『바둑』 전신인 <棋界> 창간에도 관여하셨다면 그럼 육민사를 그만 두고 한국기원으로 옮기셨겠네요?

“그때만 해도 활판인쇄 시절인지라 이후 등장한 옵셋인쇄와 달리 손이 많이 가야했고 수고로웠지. 식자공이 교정할 때 옆에서 입회도 하고 그랬어. 내가 육민사 계속 있었다는 건 그만큼 숙련된 편집장이 한명 필요했던 거지. 기술자 한 사람은 필요하거든. 활판인쇄 시대엔 잡지를 내지 않더라도 바둑출판도 해야 할 테고 또 언젠가 월간지를 다시 낼 수도 있는 거고. 최태열 사장 입장에서 보자면 말이야. 그런데 어느날 옮기게 됐잖아요? 그러니 최사장이 얼마나 실망했겠어요. 기능공 한사람만 확보한 채 재기를 기다렸는데 날 빼가버리니까.

당시 최사장이 한국기원이 바둑잡지를 창간할 것을 예견하고 내게 편지도 쓰게 했어요. 그런데 협상이 먹힐 리 없잖아요. 한국기원 김재구 사무국장이 날 만나자고 해 편집차장 스카우트 제안을 했고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기원 잡지 창간에 참여하게 된 거지요. 내 눈에 보기에도 영원히 바둑잡지를 낼만한 데는 한국기원뿐이라는 생각이었거든.
그렇더라도 최사장 입장에서야 한동안 날 몹쓸 놈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엄청난 애호가로 바둑에 돈을 많이 쏟아 부은 분인데 그 후로 미국으로 가셨죠. 미국 가 계실 때 내가 한국기원에 공로상 후보로 추천해 2002년인가에 상을 받으셨지요. 그걸로 내게 품었던 섭섭한 감정은 다 푸셨을 겁니다. 하하.”

▲ 육민사 최태열 사장. 한국 바둑출판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3종의 바둑월간지를 창간한 원조

그러고 보니 선생이 손수 창간한 바둑잡지가 <바둑> <바둑세계>에 이어 <棋界>까지 3종이나 된다. 운때가 따라주어야 가능한 것이 창간이다. 그간 우리 바둑계에서 창간잡지를 가장 많이 만들어본 사람이 필자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기자는 평생 창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은퇴하기 십상이기에 35년여 바둑글로 밥을 먹으면서 운 좋게 <바둑생활> <바둑가이드> <주간세계바둑> 3종이나 창간경험을 쌓은 필자에게 ‘창간 킬러’란 별명을 붙인 이도 있었다. 은연중 이걸 훈장처럼 뻐기고 다녔는데 선생 앞에서는 얼른 떼어 주머니에 넣어야할 거 같다.

- 그나저나 개인적으로 하나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 월간『바둑』지 초대 편집장이 대체 누구인지? 그러니까 <棋界> 창간호를 보면 정재영이란 분을 편집장으로 삼아 출범한 듯한데 두어 달 뒤 슬그머니 이름이 사라지고 안 보입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90년대쯤 캐나다에 사시던 최백산 선생이 방한했을 때 우리 후배들에게 자신이 실제 초대 편집장이었다 주장하셨고 그때부터 혼선이 왔거든요.

“정재영 씨가 초대 편집장 맞습니다.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하던 분으로 아마도 바둑평론가 활동을 병행한 동아일보 권오철 씨 추천으로 왔을 겁니다. 아무래도 바둑계가 언론미디어 쪽으로는 어둡다 보니까 큰 신문사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은 거죠. 월간지 경험은 없는 분이었고 바둑은 7급쯤 되었으려나.

이렇다 보니 내가 육민사에서 <바둑세계>를 같이 하던 최백산 씨를 추천해 데리고 온 거지. 잡지는 내놓고 봐야할 거 아냐. 손발이 맞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발간 초기에 정재영 씨가 불미스런 일로 면직되고 말았어요. 최백산 씨가 창간멤버로 함께 고생하며 활약한 건 맞지만 당시 한국기원 실세인 배상연 상무이사에게 호감을 사지 못해 내내 촉탁 딱지를 떼지 못한 채 잡지협회로 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실제, 실질 편집장’이란 직위가 있다면 정식직원이었던 내가 더 적임자였다고 주장해야할 걸? 하하.”

- 선생님을 뵈면 펙트체크해 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었습니다. 55년 4월에 대한기도원(大韓棋道院)이란 데서 발간한 <棋道(기도)>라고 하는 책자가 있는데 월간지를 표방하고 냈더라고요. 육민사에서 낸 <棋苑>보다 9년이나 빠른데 이걸 월간지로 본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지는 이것이 아닐는지요?

▲ 대한기도원에서 발행한 <棋道>.


“글쎄요. 모든 기본은 갖추었으나 후속판 없이 자멸한 듯하고요. 인쇄판이라고 할 수 없는 등사판(騰寫版), 일본말로 ‘가리방’ 등사기로 찍어낸 거니까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시중 책방에서 판매할 정도의 모양새를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이게 사단법인체(한국기원)를 이끌고 있었던 조남철 선생에게 눈엣가시 같은 홍씨 일파가 만든 것이었을 텐데 그 세력은 65년경에도 건재했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해방 되고 初단으로 귀국해서 노국수(老國手)들을 연파하며 바둑계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던 콧대 높은 일인자 조남철을요.”

67년 8월 한국기원이 월간<棋界>를 창간할 당시 프로기사의 수는 최고단자 조남철 八단을 필두로 六단 2명(김인, 윤기현), 五단 1명(김봉선) 그리고 四단이 5명에 불과했다. 모두 해봐야 42명이었고 기전은 6개였다.

월간<棋界>의 제호도 애초에는 정치하는 것을 ‘운경(雲耕)’이라 한 데 착안해 ‘밭을 갈 듯이 바둑을 간다는 뜻’의 ‘기경(棋耕)’을 가제(假題)로 잡았으나 후일 더 알기 쉬운 ‘棋界’로 바꿨다. 조남철 선생이 창간좌담회에서 “뜻은 좋으나 앞으로는 바둑팬이 젊은 학생층에서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잘 이해가 안 가리라고 생각한다”고 한 말이 반영되었음직하다.

바둑전문출판사 [현현각]을 세운 까닭

- 한국기원 편집부에서 한 5년 근무하셨던가요? 퇴사하면서 바로 바둑전문출판사 [현현각(玄玄閣)]을 세우셨지요?

“한 4년 몇 개월 근무했을 거에요. 처음 바둑계에 몸담으면서 잡은 목표가 직장생활 10년, 바둑출판사 10년쯤 해볼 참이었어요. 이른 바 ‘기계(棋界) 파동’ ‘기사(棋士) 파동’이 나기 직전 74년에 잡지기자 딱 10년을 채우고 그만둔 셈이지요. 스스로 계획 세운 대로 ‘현현각 단행본’을 내야 내 책무가 완성된다는 마음으로 한국기원을 나왔죠. 10년 세월 잡지를 만드는 내내 자꾸 고꾸라지기도 했고 나도 진절머리가 날 때였죠. 그러니 그땐 잡지에 미련이 없었어요.”

서울 종로구 관철동 골목에 67년 11월 5일 기공(起工)한 한국기원 바둑회관이 열 달 남짓 만인 68년 8월 5층 규모의 위용을 드러냈다. 1층은 세를 주어 다방이 들어섰고 2층 사무국부터 바둑공간으로 썼는데 3층엔 일반회원실, 4층엔 기사실과 특별대국실, 5층엔 널찍한 대국장을 두었다. 그 5층 계단을 올라서면서 바로 우측에 인접한 작은 방 501호실이 [현현각] 자리였다.

▲ 관철동에 자리한 한국기원 종로회관. 바둑계의 숙원이었던 바둑회관을 1967년 11월에 기공한 후 9개월 만에 갖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신식 5층 건물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제야 밝히는 건데, 처음부터 한국기원 501호실로 간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4층 남의 사무실에 잠시 의탁했었죠. 빈방이 없었거든요. 불교방송 관련서적을 출판하던 곳에서 빈 책상 하나 빌려 출판사 등록신청부터 했지요. 대표자도 유명 드라마작가이자 한국기원 이사였던 조남사 씨 명의로 등록했고 자본금도 김국수가 상당 부분 댔어요. 이런 뒷배(?)로 한국기원 공간을 얻을 수 있었던 거겠지요.”

말씀은 그리 하시지만 그간 선생이 바둑계에 봉사한 노고를 생각해 한국기원이 공간을 배려한 것이란 걸 모를 리 있겠는가.

이왕 한국기원 관철동 회관 얘기가 나온 김에 잠시 곁가지 비화를 조금 더 언급하면, 이 건물은 아주토건(주)이 지었다. 번다하고 남루한 명동바닥 한켠에 옹색하게 둥지를 틀고 있었던 (사)한국기원으로서는 번듯한 전용회관을 건립하는 게 숙원사업이었다. 이것을 당대 권력자 이후락 씨가 67년 4월 1일 4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한방에 해결해 주었다. 아주토건에 바둑회관을 무상이나 다름없이 짓게 하고 대신 경부고속도로 일정 구간을 할당해 주었다는 뒷얘기를 들은 바 있다.
어쨌거나 당시에는 관철동 일대에서 눈에 띌만한 5층 신식건물이었다(68년 8월 8일 오후에 가진 개관식에서 한국기원은 아주토건 김재억 대표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5층 [현현각]은 대국용 판 세 개쯤 놓고 책상 하나 들어가면 꽉 차는 공간이었지만 곧장 바둑계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 노니는 양산박으로 자리했다. 4층 기사실은 노소(老少) 가리지 않고 모든 기사가 공히 쓰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요즘 유행어로 ‘케미(chemistry)’가 맞는 기사끼리 따로 놀기에는 [현현각]이 아지트로 그만이었다. 주로 김인, 정창현, 하찬석, 조훈현 등이 단골멤버였고 성춘복, 박재삼 같은 문인들도 터줏대감에 속했다. 항상 담배연기 자욱했으며 왁자지껄했다.

- 74년 [현현각]을 세우고 1년 가까이 작업해 그해 처음으로 출판한 책이 <현현기경(玄玄棋經)>인 걸로 압니다. 그런데 저도 다년간 바둑출판에 종사해서 이쪽 실상을 좀 압니다만, 갓 출발한 영세 출판사가 가장 안 팔린다는 사활집부터 내는 건 모험 정도가 아니라 제 눈엔 ‘미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네요. <현현기경>부터 꼭 내야겠다 마음먹은 동기가 있었습니까?

“앞서 얘기한 <棋譜>…, 불쏘시개로 쓰인 그 사활집으로 인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남철 선생의 <바둑개론> <조남철 행마의 묘>와 같은 시리즈가 몇 종 나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일본 번역서가 횡행했다 보면 됩니다. 저작권에 어둡던 시대였고 또 수익 면에서도 일본책을 베껴 출판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그리하지 않고서는 제작비를 건지기조차 힘들 때였지요. 단행본을 내더라도 입문서나 실전기보집 쪽이라면 그나마 나았을 테지만 주판알만 굴릴 양이었다면 애초 [현현각]을 설립하지 않았을 겁니다.

▲ [현현각]의 1호 출판물 <현현기경>


우리나라의 전래사활집, <棋譜>에 소개하지 않은 걸 다 모아서 김국수가 감수해 낸 게 [현현각] <현현기경>이에요.
잘 아시다시피 중국 원나라 때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바둑고서 <玄玄棋經>은 단순히 사활문제만 수록한 게 아닙니다. 여러 파트로 나누어 당시 사상을 담아 바둑을 논한 총서(叢書)지요. 이중 사활묘수풀이를 다룬 파트가 ‘진롱’부에요. 예를 들면 ‘명주출해세(明珠出海勢)’ 맑은 구슬이 바다에서 나오는 형세…, 이런 식으로 무슨무슨 세(勢)라고 명명해 조목조목 행동(해법)요령을 다 명시하고 있잖아요.

[현현각] <현현기경>의 내용은 ‘진롱’부의 사활문제만 다룬 거지요.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이처럼 사활집만 따로 낸 적이 없었거든요. 이 뒤로 <기경중묘(碁經衆妙)> <사활묘기> 등 여섯 권 시리즈로 이어갔더니 나중 일본에서 따라하더군요. 일본 유학중이던 윤희율 初단을 통해 <기경중묘> 복사본을 입수한다든지, 출판준비를 엄청나게 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이른바 '기계(棋界) 파동’, 한국기원이 대한기원으로 양분되며 2년여 내홍을 겪었던 ‘기사(棋士) 분규' 전말에 대해 곁에서 지켜본 이야기를 들어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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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zks|2023-09-30 오후 10:26: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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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zks|2023-09-30 오후 10:25: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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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zks|2023-09-30 오후 10:22: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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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zks|2023-09-30 오후 10:17: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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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zks|2023-09-30 오후 10:13: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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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zks|2023-09-30 오후 10:07: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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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글빠글|2023-09-30 오후 9:35:00|동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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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 연봉 정용진 전무이사는 자신과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특정인 중심으로
연일 일방적 구술을 각색 도배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자고로 어물전 망신은 꼴두기가 한다고 하던데 기자로서의 기본을 망각하는구나.

20년 연상의 조남철 국수가 건넨 축하의 악수를 23세의 새로운 국수는
서양식 한손으로 답례를 하는 사진은 또 뭐꼬?
reply technozks 적절한 지적이십니다.
2023-09-30 오후 10:04:00
워러04|2023-09-30 오후 9:29: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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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롭다고하나 지금이 더 각박하고
젊은세대들은 기회가 더 줄어들었다고 여겨집니다
지나고나서 봐서일까요..
무튼 향수를 일깨우는 기사입니다
제주도조천|2023-09-30 오후 8:26:00|동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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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길목... 남아있는 두가지 즐거움- 바둑과 술중 어느것이 먼저 끊어질까??? 하는 궁금중 가운데, 온몸으로 거쳐
온 옛날은, 항상 미소를 띄게 합니다... 관철동 한국기원... 바둑 많이 두었죠.., 그러나 요즘 좋은 추억을 좀 더 만들지 못한 후
회가............ 님들도 사소한것에 싸우지 마시고.. 좋은 추억 많이 갖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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