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청원 선생의 애장품 붓과 구두 한 켤레가 한국에 온 까닭
오청원 선생의 애장품 붓과 구두 한 켤레가 한국에 온 까닭
안영이 육성증언 (7) “평생 모은 내 자료가 부실한 바둑역사를 메우는 데 한 몫 할 수 있다면…”
[기획/특집]
  • 정용진|2023-10-04 오전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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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의 페어 부문에 대만 대표로 출전했던 린하이펑(林海峰) 9단이 스승 우칭위안(吳淸源) 선생이 아꼈던 붓 한 자루를 안영이 선생에게 전달했다. 안 선생은 이 자리에서 “평소 우칭위안 선생의 제자인 린하이펑 9단에게 몇 차례에 걸쳐 우 선생의 애장품 기증을 요청했는데 이번 방한을 통해 전달받게 됐다”면서 “나중에 우칭위안 선생의 구두 한 켤레도 기증받을 예정이며 장차 바둑 박물관이 생기면 좋은 전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글은 [월간바둑]이 2023년을 맞아 기획한 '바둑계 원로에게 듣는다 - 안영이 선생 육성증언‘입니다. 올초 설연휴 기간 1,2회 게재한 데 이어 나머지 원고를 이번 한가위 연휴에 연재합니다. - 편집자 註

○● 안영이 육성증언 (1편)/ 일본 본인방에게 ‘정선’으로 두라는 통고에 한국 국수는 ‘사퇴서’를 썼다!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2편)/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국수 김인의 사퇴서에 담긴 임전자세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3편)/ 國手 김인의 처음과 끝에 서 있었던 사람, 안영이!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4편)/ 한국바둑 60~70년대는 가난했으되 희망이 용솟음치던 시절이었다!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5편)/ 한국바둑계가 한국기원과 대한기원 둘로 갈라섰던 이야기 ☜ 클릭
○● 안영이 육성증언 (6편)/ 타이틀을 땄다하여 아무나 별이 되지는 않는다! ☜ 클릭

■구술/ 안영이
■구성/ 정용진



린하이펑 九단이 손수 전달한 오청원 선생의 붓과 구두 한 켤레

- 장서만도 무려 4000여 권에 달합니다. 심지어 오청원(吳淸源ㆍ우칭위안) 선생의 구두까지 보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열정과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일본에서까지 오청원 선생이 돌아가신 후 그의 수제자인 임해봉(林海峰ㆍ린하이펑) 九단이 유품인 붓을 전달한 데 이어 왕리청 九단 편으로 구두까지 보냈겠습니까.

“하하하. 임해봉 씨로서는 귀한 것을 나에게 다 준 거야. 후일 박물관에 쓰라고. 평소 오청원 선생의 제자인 임해봉 九단에게 몇 차례 선생의 애장품을 기증해 달라고 요청했었지요. 나로선 기성(棋聖)으로 불리는 선생의 유품을 단 한 점이라도 소장하는 게 무척 의미 깊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가 2014년 8월, 오청원 선생의 100세 탄생일에 즈음해 전달받았습니다. ‘2014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 페어 부문에 대만 대표로 출전했던 임해봉 九단이 선생이 아꼈던 붓 한 자루를 먼저 건넸고요, 이후 생전에 신으셨던 구두 한 켤레도 추가로 전해주었어요. 장차 바둑 박물관이 생기면 좋은 전시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칭위엔 선생은 2014년 11월 30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15년 국수산맥배에 대만 선수로 한국에 온 왕리청 九단은 린하이펑 九단의 부탁으로 우칭위엔 선생이 신던 구두를 안영이 선생에게 전달했다. 일본바둑계로서도 귀중한 애장품을 안 선생에게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컬렉터로서의 열정을 높이 사고 있다는 증거다.


- 선생님의 컬렉션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며 하나하나 사연을 듣자면 한도 끝도 없을 거고요. 다만 말해 뭐하겠습니까만 들인 돈만 해도 감히 셈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棋譜>라는 책이 불쏘시개로 쓰였다는 데 충격을 받아가지고 시작하게 된, 이를테면 나로선 질곡(桎梏) 같은 것인데…. 서울에 올라와 하숙하면서 일요일마다 혼자 청계천 일대를 돌아다니는 게 일과였어요. 청계고가가 아직 생기기 전인데 그때 고서점을 돌다 ‘관철동의 디오게네스’로 불린 민병산 선생을 만나게 된 거에요. 한국기원에 있을 때는 만날 4층 대국실에서 바둑 두는 것을 자주 봤는데 거기서 보니까 아주 반갑지요. 나중엔 친해졌지요.

일본 고서 구입비에 돈이 솔찬히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바둑자료랄 것이 많이 없잖아요? 일본은 도쿄에 가면 진보초(神保町) 고서점 거리가 있는데 거기서 그땟돈 몇 만 엔씩 주고 샀어요. 영수증도 있어요. 일본책은 띠지가 있어 거기에 책값이 얼마라고까지 써 있지요.”

미치지 않고서는 어느 분야건 일가(一家)를 이룰 수 없다. 선생은 바둑서지학, 컬렉터로서 일가를 이뤘고 인정을 받았으나 그 대가로 한 남자로서 꿈꿀 만한 일가(가정)는 포기해야했다. 박치문 위원이 들려준 선생의 맞선 일화 한도막은 그래서 더 안쓰럽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웃픈’,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픈 이야기랄까.

선생은 50세 언저리에 딱 한번 맞선을 나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맞선상대는 세무직 공무원이었다고 하니 상당히 좋은 혼처였다. 그런데 그 처자의 엄마가 강력히 반대해 무산됐다고 한다. 오십 나이에 집도 한칸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딸을 보내느냐는 거였다. 남자의 사정을 어떻게 바로 알아챘을까? 선자리에서 선생이 먼저 이실직고부터 하고 시작했던 거였다.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녀야하는 딸깍발이 처지일망정 그런 자리에서라면 자기를 소개할 때는 조금은 감추고 부풀리는 게 인간 본성 아닌가.

“이렇듯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고 보면 이거야 원, 장가를 들겠다는 마음이 있기나 했던 건지 모르겠다.” 이 얘기를 전하며 박치문 선배는 껄껄 웃었다.

<조선 어부의 일가(朝鮮の漁夫の一家)>를 마주했을 때의 기쁨

- 마지막으로, 컬렉션 중 최고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그러니까 보자마자 막 설레고 희열을 느낀 그런 최고의 순간이 있었을 텐데요. 가장 기뻤던 순간 한 장면을 꼽아보신다면?

“하나하나가 전부 귀중하고 기쁜데요. 현대 것이긴 한데 일본 진보초에서 한권에 아주 비싼 값으로, 10만 엔 이상 주고 산 책 속에 수록돼 있는 ‘조선 어부의 일가(朝鮮の漁夫の一家)’라는 판화그림을 마주할 때가 그런 순간이었죠.

19세기초엔 표류하다가 대마도에 표착한 조선인들을 대마도주(島主)는 본토인과 분리수용해 보호감시했어요. 당시 보호구역에서 조선 어부 한 가족이 바둑을 두며 여일하는 모습을 일본과 동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던 독일인 의사이자 선교사인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가 그렸어요. 시볼트는 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개개인 초상화를 찍기도 하고 많은 것을 남겨 그의 책 <일본> 중에 수록했는데. 그 책을 일본 고서점에서 발견한 거지요.

<일본>이라는 책은 총 6권의 시리즈로 꾸민 대작인데 제5권이 ‘조선’이에요. 당시 조선의 놀이에 대해, 바둑뿐 아니라 그네라든가 윷놀이 등등이 실려 있어요. 희귀본이지요.

▲ ‘조선 어부의 일가’ 판화.


저 판화가 일본판이 있고 유럽판이 있는데 내것은 유럽판을 구한 거에요. 바둑 두는 저 그림도 서양사람들한테는 희귀하게 보였던지 시볼트가 고향에 돌아가서 출판했을 거 아녜요? 아주 묘하게 구했죠. 우연찮게 발견하고선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그 길로 친구한테로 달려가서는 진탕 술을 먹고 그날 전철을 못타고 택시를 타고 귀가한 기억이 나네요. 제5권 ‘조선편’은 껍데기가 태극 문양이 그려진 것이 있었어요. 태극기가 표지에요. 딱 박혀 있어요.”

‘어부의 일가’를 보면서, 예전 우리 선조는 장거리를 이동할 때 바둑판을 휴대하고 다녔다는 걸 알 수 있다. 거미줄처럼 육로가 사통팔달로 발전한 요즘과 달리 과거에는 주로 해로(배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 항구 저 항구 들러 거치다 보면 며칠씩 걸리기 예사였다. 그럴 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우리가 여행할 때 자석바둑판을 휴대했던 것처럼 바둑판과 알을 봇짐에 싸들고 승선한 것이다. ‘어부의 일가’ 판화는 당시 바둑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 서민까지 널리 즐기던 놀이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표다.

평생 ‘순장바둑’연구에 몰두, 목숨 걸고 시킴왕국까지 다녀와

- 선생님은 평생 우리 ‘순장바둑’에 천착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킴 바둑’을 찾아 96년 가을에 인도까지 다녀오시기까지 했지요. 그때 제가 월간『바둑』 편집장을 하던 시절인데 선생님의 제안 덕에 창간 30주년 기념 기획물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어요. 그때 여비밖에 지원 못해 드린 게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순장바둑의 뿌리를 찾기 위한 일환으로 특별취재팀을 꾸려 선생은 96년 10월 15일부터 보름간 인도 동북쪽 끝인 시킴(Sikkim)에서부터 서북쪽 끝인 다람살라(Dharamshala)를 횡단하는 여정을 거쳤다. 월간『바둑』 구승준 기자가 동행한 이 기행에서 삼국시대에 발원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 순장바둑이 불교를 통해 들어온 티베트 지역의 ‘12신장(神將) 바둑’에 영향을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것은 그동안 바둑이 중국에서 만들어져 한반도-일본을 거쳐 전파됐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였다. 적어도 순장바둑에 한해서만큼은 중국이 아닌 티베트 지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바둑의 또다른 전파경로를 주장하는 것이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 안영이 선생은 순장바둑이 티베트 지역의 ‘12신장 바둑’에 영향을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괸련 내용은 월간 『바둑』 창간 30주년 특집 기획물로 보도됐다.


옛 시킴왕국의 왕가(王家)인 레충(J.K. Rech ung) 씨가 기증한 시킴 바둑판은 천에 그린 17줄 바둑판(가로68cm×세로72cm)으로, 13개의 꽃무늬 화점이 뚜렷이 그려져 있어 우리 순장바둑과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순장바둑의 특징은 화점에 있다. 화점의 비밀을 푸는 것이 곧 우리바둑의 기원을 찾는 일이나 다름없다.

“중국 바둑판은 화점이 4개까지 있는 걸 봤어요. 일본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 있는 바둑판들 그런 것도 나는 전부 피난품이라고 생각해. 장제스(蔣介石)가 내전에서 지고 귀한 유물들을 대만으로 날랐듯이 나당연합군에 밀린 백제 왕족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일본에서 백제를 돕기 위해 파병한 지원군이 많이 죽었을 것이고 대신에 빈자리에 싣고 갈 것이 뭐가 있겠어요. 백제의 보물들이지. 백제 의자왕이 선물한 것으로 추정하는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이 천원을 중심으로 사방 16점 꽃무늬 화점이 선명하잖아요? 우리 순장바둑판과 같지요. 당연히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걸 말하는 증표에요.”

- 그 머나먼 시킴왕국에까지 갈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에요? 시킴 바둑판에 대해 알고 계셨던 건가요?

“1956년인가, 2500주년 석가탄신 기념세계대회가 일본에서 열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시킴왕자가 일본에 오면서 처음 시킴 바둑판을 가져온 기록이 보여 호기심을 갖게 됐지요. 시킴에 가기 전 이를 조사하면서 일본기원에 확인해 봤어요. 56년 <기도>지 몇월호인가에 나와 있어서 확인했더니 일본기원에는 시킴 바둑판이 없다고 그래. 그래서 시킴왕국에 직접 가봐야겠다 생각한 겁니다.

시킴은 네팔하고 부탄 양 사이에 끼어 있는 공국인데 내가 갈 때는 시킴공국이 인도에 편입돼 버렸더라고. 그런데도 비자를 한번 더 받아야했어. 그 정도로 엄격하더라고요. 가는 도로가 아주 좁아서 겨우 트럭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폭인데 동행한 구승준 기자가 나중에 또 간다면 자기는 절대 안 간다고 할 정도로 목숨을 걸고 다녔어요. 떨어지면 그대로 죽는 아득한 벼랑길이에요. 길가에 사고 차가 처박힌 채 누워있는 모습도 보이고.

그렇게 해서 얻어온 17줄 천 바둑판이었지요. 시킴바둑이 순장바둑과 많이 흡사해요. 아직까지 17줄 바둑판이 출토된 적은 없어요. 그러니 19줄이 먼저인지 17줄이 먼저인지 알 순 없는 노릇이지요.”

▲ 옛 시킴왕국의 왕가(王家)인 레충(J.K.Rechung) 씨가 기증한 17줄 시킴 바둑판.


- 순장바둑판만 해도 여러 종으로 20여 개나 갖고 계신다지요? 심지어 한번 쓰고 버리는 것으로 여겼던 바둑대회 포스터까지 소장하고 계십니다. 이젠 선생님의 컬렉션을 인수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바둑박물관도 꿈꾸지 못할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 소장품을 10년 간격으로 딱 두 번 전시했을 뿐인데, 하고 싶은 말씀이 많을 듯합니다.

“실은 그게 걱정입니다. 난 언제 가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돼버렸어요. 평생 여동생 집에 얹혀살며 방방마다 온통 바둑관련 물건들을 쌓아놓고 버텨왔지요. 우리바둑계가 눈부신 발전을 했다지만 승부에만, 실력배양에만 관심이 있었지 역사고 문화고 이런 것들은 생각이 하나도 없는 듯해 안타깝고 답답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마인드가 부족한 탓이라고 봅니다. 더는 내 물건을 보관할 데도 없고 아직 기력이 남아있을 때 정리해 주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여동생한테, 공적으로는 우리 바둑계에 마지막 할일인 거 같아요. 그래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지 않겠어요?”

마음이 짠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일을 평생 묵언으로 수행한 이가 ‘여동생에게 변변한 전셋값 한번 쥐어주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할 때 바둑계 후배로서 무척 부끄러웠다. 한국의 그 어떤 바둑협회나 단체조차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가운데 선생은 처연히 인생 끝을 향해 가고 계시다.

▲ 안영이 선생은 자신이 평생 모아온 바둑자료를 넘겨받아 우리바둑사의 뿌리가 결코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힘써줄 소장자를 간절히 찾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변변히 남아있는 바둑사료, 자료가 없다. 그렇기에 선생이 목숨처럼 모으고 보관해온 이 자료가 아니고선 번듯한 바둑박물관은커녕 기념관 하나 채우는 것조차 엄두를 낼 수 없는 처지다. 이러다가 재력 있는 일본의 바둑애호가라도 덜컥 나서 인수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 일제강점기때 사비를 털어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집, 보존, 연구한 전형필(全鎣弼) 선생마냥 자신은 처마의 비를 맞을지언정 안방에는 바둑계의 보물들을 간직해 왔건만 이제 알아주는 이 없다. 선생의 나이도 나이지만 습기와 온도 조절은커녕 더는 개인주택 골방에서 먼지 더께 쌓이게 해서는 안될 자료다. 이제는 국내 바둑애호가, 독지가의 관심에 기대어볼 따름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며칠 뒤 선생께서 카톡으로 금반지를 찍은 사진을 한장 보냈다.

▲ 기사회에서 퇴직 기념으로 받은 금반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2005년에 낸 졸고(拙著)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 편집후기에서 한번 밝혔던 내용이긴 한데 이번 인터뷰할 때는 그 증거가 될 금반지를 미처 찾지 못해 보류했던 얘기에요. 금 3돈에 한국기원 마크가 들어간 귀한 반지를 고이 간직하게 된 사연입니다. 내가 바둑기자를 그만 둘 때 당시 기사 수가 40명도 안됐을 때로 기억하는데, 한국기원 직원인데도 기사 야유회나 이런 데 일일이 나를 다 불렀어요. 그만큼 기사들과 가까이 지냈어요.”

이 바람에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 말미에 선생이 쓴 편집후기를 꺼내 읽게 됐다. 18년 전 역저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를 ‘엮고 나서’ 쓴 내용이지만 여전히, 아니 한국바둑사에 영원히 유효한 말씀이다. 선생이 평생 그토록 원하던 바, ‘우리의 부실한 바둑 역사의 한 부분을 메우고 우리네의 바둑족보를 꾸미는 데 한 몫’한 사람이, 안영이 선생이다. 적어도 70년대 초 관철동 사람들은 이를 알아주었다. 그렇지만 50년 세월이 지나 지금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해서 이번 ‘신년특집/육성증언’ 시리즈의 대단원을 선생이 18년 전 쓴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의 후기, ‘공배를 메우며’를 다시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 적절한 마음이 어디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1967년 8월에 한국기원에서 <바둑>지를 창간할 때 함께 참여했다. 당시에 후기의 제목을 ‘공배를 메우면서’라 이름 붙였는데, 그 속내인즉 순장바둑에 대한 향수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있어 마지막이 될 이 작은 여백 메우기를 하면서 세월의 덧없음에 새삼 옛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난가산(爛柯山)의 초부(樵夫)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70년대 초, 한국기원을 그만 두고 바둑서적 전문출판사를 꾸며 볼 생각을 하던 때였다. 30여 수의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 불려갔는데, 거기서 나에게 뜻밖에도 퇴직 기념으로 금반지 하나를 선사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부름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전례 없이 귀한 것을 선물로 준 것에 감격했다. 당시는 기사회 기금이 불과 수백만 원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가난한 살림을 하던 때의 호의인지라 그것이 내내 필자로 하여금 바둑계를 멀리 떠날 수 없게 하는 멍에가 됐다. 신선들 틈에 끼어 바둑 돌 놓는 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보낸 것이 어느새 41년(2005년 기준)이 됐다.

전통바둑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세상은 온통 현대바둑의 천하다. 그럴수록 필자는 간절히 옛날로의 회귀를 하고 있었다. 이 작은 책자는 그간 간단없이 필자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던 상념의 기록표 같은 것이다. 우리의 부실한 바둑 역사의 한 부분을 메우고 우리네의 바둑족보를 꾸미는 데 한 몫을 할 수 있다면 그 위에 더 바랄 것이 없다.


- 여러날 인터뷰에 응해 주신 선생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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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러04|2023-10-06 오후 10:39:00|동감 0
동감 댓글
명절 특집 기사 잘 보았습니다
안영이 선생님의 노고와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
좋은 결과가 나왔어면 합니다
워러04|2023-10-06 오후 10:38:00|동감 0
동감 댓글
예전의 실력있고 엄청난 내공의 유저들이 사라진 것은 어쩔수 없다 손 치더라도
작금의 이 깽판 일변도랄지 천박한 분위기는 참으로 보기가 힘들군요
다수의 유저들은 조용히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익명에 안 보인다고는 하나 자중합시다
reply 빠글빠글 50년간 최측근들의 검증 안된 일방적 구술 내용은 자칫 다수의 유저들을 핫바지로 만든다
는 점도 관과해서는 아니 되는 것 아닐런지... 그리고 전체 구술 내용을 정독해보면 천박한
내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니 참고를 바라겠나이다. 특집 기획이라는 명분?으로
똑같은 기사를 3탕,4탕으로 올리는 저의는 결국 특정인 용비어천가에 불과한 기사일
뿐이며 그동안 바둑계가 폐쇄적인 문화 속에 갇혔다 해도 과언이 아님..
2023-10-07 오전 12:15:00
reply 빠글빠글 익명제도가 불편하다면 기명제로 바꾸자고 합시다. 대찬성이요. 그리고 무엇이 깽판
일변도인지도 지적해주면 감사하겠나이다. 끝으로 소생은 평생을 글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왔나이다.
2023-10-07 오전 12:30:00
reply 워러04 님은 뭔가 관계가 있고 어느정도 내용을 아는듯 하는 모양새신데 그렇다면 한두가지 정도라도 팩트를 내 놓아
보시죠.한평생을 헌신한 분의 이야기에 이렇게 반감을 드러낼 정도면 이유가 있을것 아닐까요?
2023-10-07 오후 3:08:00
reply 빠글빠글 무엇이 깽판 일변도였는지에 대하여 그대의 동문서답이야말로 모양새가 별로이네요. 정용
진은 수십 년간의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을 한국바둑계의 유일무이한 산증인이자
바둑서지학자라고 훨씬 전부터 3탕,4탕 일방적으로 극찬한 이유와 배경을 아직도
파악 못하고 있다니... 바둑계의 산증인들은 지금도 도처에 계시다오. 기자의 기본
수칙도 모르는 전형적인 찌라시 기자 행태를 보여준 사이버오로 시스템의 한계라
하겠으며 또한 뜬금없는 댓글은 누가 보더라도 끄덕이게 해주삼으로 짧게 정리함.. 끝
2023-10-07 오후 6:09:00
아공|2023-10-05 오후 5:28:00|동감 0
동감 댓글
바둑 아시안게임 기간이라고 아시안게임만 뉴스에 올려야 한다는 발상은 좀 이상하다.
명절 연휴에 이런 기사도 볼만하지 않은가.
비판을 위한 비판 같은 반복되는 비판은 좀 보기에 불편한 것이다.
reply technozks 글쓴이 삭제
reply technozks 글쓴이 삭제
reply technozks 글쓴이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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