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아들의 바둑을 보면 안다!
아버지는 아들의 바둑을 보면 안다!
‘신공지능’을 만든 아버지 신상용 씨 특별인터뷰 ②
[기획/특집]
  • 정용진|2025-05-03 오전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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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TV화면에 비친 아들의 표정만 봐도, 인터넷에 찍힌 아들의 착점만 봐도 아들의 컨디션을 알 수 있다. [사진제공/ 월간바둑]

손흥민 선수가 그러하듯 신진서 九단 또한 아버지의 존재를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신진서를 만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가르치고(敎) 길렀을까(育).

이 글은 [월간바둑] 2025년 1월호부터 3월호에 걸쳐 실은 '신진서 九단의 아버지 신상용 씨' 특별인터뷰를 5월 황금연휴를 맞아 다시 소개하는 것입니다. 본문 중 언급하는 기록과 일시는 원고 게재 당시 기준 그대로 전재했음을 밝힙니다. 신진서 九단의 어릴 적 자료사진은 신상용 씨로부터 제공받은 것입니다. 매달 25일에 발행하는 [월간바둑]에도 관심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註


○● ‘신공지능’을 만든 아버지 신상용 씨 특별인터뷰 ① 아들에게 부담감을 내려놓고 즐기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 1편 보기 클릭



흥민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나는 밥먹는 것을 포기한다. 흥민이 경기하는 날 뭘 먹었다 하면 체하지 않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빈속으로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한다. 하지만 구경하고 바라본다는 의미의 ‘관람(觀覽)’이라면 나에게는 그 단어가 맞지 않겠다. 관람석의 나는 굳어진 얼굴을 한시도 펼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뛰는 심정으로 앉아 있는 것이니 어쩌면 운동장에서 뛰는 게 차라리 속편한 길인지도 모르겠다. 굳은 표정으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경기를 보는 내 마음속 소리는 오직 ‘오늘도 흥민이가 부상 없이 행복한 경기를 마쳐야 할 텐데……’이다. - 손웅정 저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는 아들이 뛰는 경기를 절대 관중의 입장에서 지켜볼 수 없다고 합니다. 2019년 12월 영국 프리미어리그(PL) 번리 전에서 70미터를 단독 질주하며 넣은 득점으로 푸스카스상을 받은 그 골도 아들이 볼을 터치할 때마다 ‘아, 조금 길다, 아, 조금 짧다’ 이렇게 온 신경을 집중하며 봤고 골키퍼와 마주한 순간에도 ‘침착하게, 침착하게’를 되뇌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아들(신진서)의 대국을 늘 관전하시는지요? 아들이 두는 걸 보면 컨디션이 어떤지 딱 감이 잡히시나요?


“네, 알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보는데 얼굴만 봐도, 착점만 봐도 알지요. 이번 삼성화재배에서도 큰 대회를 치르고 나면 적어도 1~2주는 회복기를 가져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출전했기에, 평소에 그런 수를 안 두는데 초반 2선에 붙인 수, 그런 수를 보고 내가 텔레비전을 바로 끄면서 진서는 지금 체력이 방전됐다, 이번 삼성화재배는 안되겠다 하고선 그냥 다른 거 합니다.”

▲ [장면] 2024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
●딩하오 九단 ○신진서 九단

[장면]의 백1 붙임수를 말한다.
“여길 뒀어요? 독특하긴 한데….” 해설자들은 당대의 일인자가 둔 수라 다들 말을 아꼈지만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의외의 이 한수에 인공지능 승률그래프는 10퍼센트가 떨어졌지만 집에서 관전하던 아버지는 조용히 텔레비전을 껐다.

- 그래도 궁금하실 텐데….

“안 궁금해요. 왜냐하면 2선 붙임수를 보고 저것은 진서 바둑이 아니다. 컨디션, 멘탈이 붕괴가 왔구나. 그런 판을 여러 판 봐왔으니까요. 그럼 보는 나도 힘들지만 이때부터는 아들을 보는 게 아니라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 보이니까. 그런 미세한 부분까지 전달이 되니까 오히려 안 보고 나중에, 며칠 있다가 말을 하지요.

2선 붙임은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컨디션이 나빠도 2선에 붙인 이런 수는 점수는 비록 많이 안 떨어지지만 발단은 거기서부터 바둑이 기울어지는 거니까.
그러면…, 말이 없이 그걸 받아들이면…, 뭐 자기도 알겠지. 아는데 이제 그걸 자기가 캐치할,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 이런 이야기도 안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요. 공연히 스트레스만 가중시키는 노릇일 테니까.

예전에는 좋은 바둑도 실수해 진다거나 급하게 서두르다가 엎어지거나 이런 게 좀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바로 잡았다고 알고 있는데, 뭔가 본인 컨디션이 안 좋고 하면 예전에 그런 버릇이 알게 모르게 나오는 거죠.”

- 세계랭킹 1위도 사람인지라 완벽할 순 없겠지요. 그렇다고는 하나 명색이 최고의 플레이어로 우뚝 선 마당에 성장기 과정에서 안고 있었던 악습과는 또 차원을 달리하는 실착이라고 봅니다. 그런 요인을 중국 기사들은 ‘압박감’, ‘부담감’에서 기인한 것이라 분석하고 있는 걸 테고요.

손웅정 씨가 아들 손흥민보다 결코 축구실력이 뛰어나서 요소 요소 중심을 잡아주는 게 아니듯 신선생님 또한 기력이 인터넷 7~8단을 오르내리는 고수이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아들의 바둑을 보며 이처럼 한 장면만으로도 직감을 하고 멘탈을 잡아주니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것이 수치로 계량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일감(一感)’인가 봅니다.


▲ [AI 제시도]

[AI 제시도] 아버지가 첫눈에 ‘이건 아니다!’ 감지했던 2선 붙임수로는 백1로 두는 게 최선이라고 인공지능은 말한다. 신진서 九단은 흑이 당장 2로 두면 백에게 약점이 있어 곤란하다고 보았겠지만, 이곳은 아예 가볍게 여기고 백3 이하로 국면을 넓게 멀리 관조하며 운용하라 이른다.
좌상변은 백9면 패로 버티는 수단이 있기에 이하 백13으로 패싸움을 펼치며 얼마든지 값을 뽑아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 [장면 이후의 실전진행]

[이후의 실전진행] 신진서 九단은 아마 흑5의 수를 못 보았던 거 같다. 다음 흑'가'의 급소가 너무 아프므로 백6을 손뺄 수 없다. 흑7까지의 진행은 분명 흑이 포인트를 올린 모습이다.

여기까지는 얼마전 끝난 삼성화재배를 중심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생각과 신진서 九단이 안고 있는 ‘일인자로서의 부담감’에 대해 기보를 곁들여 분석해 보았다. 계엄시국 탓에, 아들을 세계바둑 일인자로 키운 아버지를 만나 취기 오를 만큼 회포를 풀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두서없이 많은 얘기를 나눴다. 혹시나 숨겨진 에피소드가 있을까, 아들을 천하제일 ‘신공지능’으로 키운 이야기가 궁금했다.

▲ 초등학교 1학년 당시 문경새재배에 출전한 신진서와 아버지 신상용 씨가 근처 유원지를 찾아 한때를 보내는 모습. 바둑에서만 엄격한 아버지였다.

스무 살 넘어 대학생 때 배운 바둑…훗날 '신공지능' 아들을 잉태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불세출의 자식을 키운 아버지들의 모습은 흡사하다. 신진서 九단을 빚은 아버지 신상용 씨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절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가 포개졌다. 이들의 양육방식과 생각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속담이 달리 나온 게 아니구나 싶었다.

2021년 손웅정 씨가 펴낸 책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곳곳에서 접했던 대목이 곧 신상용 씨의 말과 맞닿아 있었다. 아니 데칼코마니 같았고, 한 저수지에서 퍼올린 용수로 기른 작물이 흥민, 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신진서 九단이 출간한 「대국-기본에서 최선으로」 책제목도 ‘기본’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아이쿠, 우리 진서가 뭐 말이 그렇지 월드스타 손흥민이 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큰일 나지. 비교도 안 되는데…. 그게 조금 (손흥민 성장과 비슷한) 그런 루트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손흥민 하고 비교를 해버리면….”

- 그렇지 않습니다. 바둑계의 자랑이고요. 뭔가 남들과 달리 기르고 가르친 데 차이점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어릴 적부터 그간의 육성(育成)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옛날에는 굉장히 치열했던 것 같은데 다 까먹고…. 이제 세월이 한 20년 가까이 지나다 보니까 그냥 일상생활처럼 느껴지고 그렇습니다. 특별한 게 있었나 유추해 보니까 뭔가 흔적이 있는데 (당시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바둑공부에 좀 몰입해 있었다 정도? 요즘 보통가족은 어디 놀러가 사진을 찍거나 이벤트를 하거나 이런 게 당연한 일인데 전혀 없었던 걸 보면 또 엄청나게 치열하게 바둑에 매진해 왔구나 싶기도 하고. (웃음) 어찌보면 한 15년, 20년간 지금도 그런 생활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제는 내가 괜히 진서한테 스트레스구나, 내가 잘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켜봅니다.”

- 손웅정 씨가 아들에게 축구를 시킨 계기에는 자신이 한때 국가대표 상비군에서까지 뛴 선수출신이었다는 점이 분명 작용했을 테고, 또 직접 가르칠 엄두까지 낼 수 있었겠지요. 신선생도 기력이 꽤 세시고 부산에서 기원을 운영하셨으니 아들(신진서)을 프로기사로 키운 건 자연스런 일이었을 듯합니다. 아버지께서 바둑과는 어떻게 연을 맺게 됐고, 또 아들의 기재는 몇 살 때 알아보신 건가요?

“예전에는 인터넷 7~8단 정도 뒀는데 지금은 술 한잔하고 가끔씩 즐기는 형편이라 기력이 예전만 못합니다.
바둑은 늦은 나이에, 스무 살 넘어 대학생 때 배웠습니다. 친구가 조치훈 九단이 본인방 타이틀을 땄다며 바둑판을 덜렁덜렁 들고 와서는 바둑 한번 두어보자고, 그 시골짝(고향 남해)에서 말이에요. 바둑의'바'자도 모르는 놈한테 (웃음). 그래서 바둑을 두는데 입구(口)자, 쌍립(立) 이런 게 굉장히 사람을 끌어당기더라고. 입구자로 딱 달아가니까 이걸 끊을 수가 없어요. 아, 입구자는 끊을 수 없는 거구나. 쌍립을 그 다음에 배웠어요. 돌 두 개, 두 개 쌍립을 하니까 이것도 못 끊는구나.

그걸 배운 다음에 비마(飛馬) 끝내기를 알게 됐는데, 너무 신기한 거야. 동네 남해 읍내에 바둑 좀 둔다는 사람들한테 친구와 가서 포석도 덜 끝난 시점에서 비마끝내기를 딱 하니까 ‘자네들은 바둑 인연이 없네. 바둑 배우지 말게’ 하더라고. 하하. 그런 상황이 한 2~3년 지속이 됐죠. 그리고 학교 다니면서 책도 보고 하니까 그때 4~5급까지 늘더라고. 그 후 기원할 때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나름 자세를 잡게 된 거죠.”

▲ 신진서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 신상용 씨.

‘기원’을 한 건 진서를 만나려고 돌아간 과정이 아니었나

- 바둑을 좋아하시기는 했어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기원(棋院)을 차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언제,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어떻게 보면 기원을 하셨기에 오늘날의 신진서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만….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상용이 넌 진서를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돌고 돌아갔다고요. 생각해 보니까, 이런 걸 운명론이라고 해야 할지 필연론이라고 해야 할지. 하긴 결과에 갖다 붙인 내 뇌피셜이겠지만, 그렇긴 해도 진서를 만나기 위한 그런 과정이 좀 있더라고. 내가 중간에 상당히 힘든 부분이 좀 있었고 그것이 기원을 열기까지의 과정이었으니까.

내가 원래 경상대 법대에 합격했다가 한해 꿇었거든요. 가정형편상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못 가는 상황이 돼서…. 그 다음해 경영학과를 갔어요. 나는 경영학 체질 아니거든요. 하여간 졸업하고 서울에서 공채로 현대그룹에 한 1년 다니다가 부산에 내려왔다가 다시 상경해 수협은행에도 좀 다녔어요. 그런데 그게 안 맞더라고 체질이. 딱 시간 돼 회사 가고 퇴근하고 이게 안 되더라고. 해서 좀 다니다 말았는데, 부산에 내려가서 친구들하고 우리 기원이나 한번 해보자는 말이 나왔죠. 그때는 기원도 어느 정도 될 때였으니까.

그렇기는 해도 당시는 시골에서 서울 버젓한 직장을 다닌다고 하면 동네잔치도 하고 막 그럴 때였어요. 그런 놈이 그만두고 내려와 느닷없이 기원을 여니까 친지들로부터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오고 그랬죠.

그렇게 친구 세 명이서 부산 다대포에 기원을 냈어요. 스물아홉 때였으니. 그때 다대포는 부산 외곽이었어요. 별로 크게 투자도 안 하고 시작했는데 손님이 많이 오더라고. 80년대 말부터 이창호가 이름을 막 알리고 있던 시기라서 덕을 많이 봤지요. 당시 이창호가 한번 우승했는데 ‘그거 한번 우승해 가지고는 모른다’, 아직은 이런 분위기 였을 때였는데….
그 무렵부터 갑자기 기원에 학부모들이 애들 손목을 끌고 와서는 애가 ‘내 안할래!’ 이러면 엄마가 엉덩이를 때려가면서까지 ‘이거 안 하면 안 되는 거야~’ 이런 진풍경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창호붐이 일어난 거죠. 그러니까 애들이 50~60명으로 늘어나는 거예요. 그때 다대포에 아파트가 막 지어지면서 세대수가 3천~5천 막 이렇게 늘어날 때거든요.”

▲ 만4세, 바둑학원 한쪽에서 놀다가 바둑을 배운 신진서.

어린 진서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바둑학원에 데리고 나왔다가

- 그럼 다대포에서 기원과 병행해 아이들을 가르치신 거군요?

“기원에도 애들이 막 몰려오고 이럴 때인데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요. 가령 부산에 바둑교실이 50개 정도 있다고 하면 한 10% 정도가 100명이 넘어요. 거기에 우리가 속했어. 그 당시에 100명이면 상당히 잘 된 거죠.

그 시절 한국기원 인가(認可·전국바둑교실협회) 바둑교실이 있고 인가가 없는 데가 있었어요. 부산에서 인가 쪽은 김철중 원장 이런 분이 최초였고 비인가 쪽은 우리가 또 최초였고. 그런데 학생은 우리가 오히려 더 많았어. 그러자 이걸 보고 다대포 쪽에도 전바협에 속한 인가교실이 들어왔고, 그 외는 인가를 못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전바협 교실하고 싸우는 거보다 노하우가 있으니까 다른 데로 가 인가를 내서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 해서 그걸 넘기고 주례동으로 갔어요. 기원을 시작한 다대포는 사하구고 주례는 사상구에요.

막상 주례로 옮기니까 생각만큼 잘 안 되더라고. 40~50명 선에 그치는 거야. 이 인원으로는 경영하기 쉽지 않아요. 다대동 살림집에서 그쪽 벚꽃길 따라서 바둑학원이 있는 주례로 출퇴근했는데 그땐 벚꽃도 안 보였지. 삶이 퍽퍽하니까. 그래서 안 되겠다, 장가를 가야 되겠다. 그 무렵 진서엄마하고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고 나니까 옛날 그 인원, 100~120명이 차더라고. 그때 진서엄마도 학원차 운전을 좀 하고 그러면서….

2000년 3월에 다대동에서 진서를 낳고 서너 살 때 주례동으로 완전히 이사했어요. 학원 애들이 한창 많았을 때라 도통 시간이 없었어요. 큰아들 진현이와 진서가 네 살 터울이에요. 바둑학원에서 진현이가 바둑공부를 했는데 애들 가르친다고 그걸 신경을 못 썼어요.”

- 그럼 신진서 형님은 몇 살까지 바둑을 했나요? 지금은 바둑과 전혀 관계가 없고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바둑학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 시켜보고, 그 이후에는 흥미가 없었으니까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죠. 내가 진서한테 붙어 있으니까 자기는 또 희생자죠. 진현이는 내보다는 못 두고 진서는 1년 만에 나를 잡더라고. 여섯 살 말에 내가 잡혔지. 그때 이미 인터넷 7단으로 셌거든.”

▲ 형 진현과는 네 살 터울이다.

- 우리 나이로 네 살쯤 바둑돌을 잡기 시작해 다섯 살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한 1년 지나니까 아버지 실력을 넘어선 거군요. 신진서 九단이 처음 입문할 때 이야기 좀 해주시죠?

“진현이가 바둑 딱 1년 배우고, 일곱 살 때 9급까지 올라갔는데 거기서 멈춰서더라고. 그래서 진현이를 보면서 바둑 힘든 데 뭣하러 시키겠어, 내 핏줄이 있는데(아빠 재능이 별로인데 진서도 그렇지 않겠어?), 그런 마음이었는데 진서 네 살 때 돌봐 주시던 장모님이 갑자기 별세하셨어요. 그 바람에 진서엄마에게 진서를 바둑학원에 데리고 나와 놀게 해라 그랬지. 진서엄마가 운전하고 이러는 게 힘들어 보이기도 하여 이참에 학원 안에 있으라고. 이렇게 바둑학원에서 데리고 나와 놀게 하면서 진서가 어깨너머로 바둑을 접하게 된 거지요.

그때 진서엄마가 대여섯 살 애들 데리고 노는 입문반 공간을 옆에 조그맣게 마련해 가르쳤어요. 자기 혼자 애들 가르치랴 진서 돌보랴 다 할 수 없으니까 애한테 정석 같은 거 이런 거 놔보라 한 거죠. 그러니까 아이가 제법 놓고 돌 따내고 한두 달 하니까 날일자정석 이런 것도 잘 따라 놓고. 이때가 네 살에서 다섯 살 초 무렵이었어요. 한글도 모를 때였거든요. 애 봐 줄 사람이 없어서 학원에 데리고 와 놀게 한 것인데 두 달 배우고 애 엄마가 내 보고 데려가라고 했으니까.

데리고 와서 30급을 달아줬는데 1년 만에, 여섯 살 초에 부산시장배 저학년부에 출전해 송지훈, 안병모 이런 어린이 강자들을 이기고 우승을 하더라고. 두 살 차이가 나는 초등 1학년 형들이었어요. 그때는 유치부가 없었기 때문에 1~3학년 저학년부에 나간 거지.”

프로를 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갈림길과 아버지의 ‘촉’

- 그럼 이 무렵에 전문기사로 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셨겠네요?

“그때 전문기사로 보내야 되느냐 안 보내느냐 이거는 크게 우려를 안 했는데, 바둑계 분위기가, 이미 바둑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이쪽 시장(市場)이 더 우려스러웠거든요. 어디 가면 원장들한테 항상 물어봤어요. 앞으로 바둑학원 또는 바둑이라는 이 종목이 어떻게 되겠느냐?
여럿에게 오랫동안 물어봤는데 한 사람이 딱 이야기를 하기를, 바둑은 절대 사라지거나 없어지지는 않는다. 만약에 당신 아들이 일인자가 된다면 당신뿐 아니고 가족이나 주변까지도 굉장히 큰 혜택을 보니까 혹시 그런 재능이 보인다면 그렇게 고민하고 있다는 자체가 나는 이해가 안 간다, 그러시는 거야. 나이가 내보다 열 살 많은 원장이….”

- 그 말에 방향을 굳히셨다는 건데, 그렇다고는 해도 내 아이가 일인자가 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건 내가 보면 알죠. 바둑학원을 내고 10년 넘게 애들을 가르쳤는데…. 그때 김지석(현 九단)이가 여덟 살 때 부산 이붕배에 오면서 소문이 났었거든요. 저 호남에 있는 여덟 살짜리 애가 정말 잘 둔다. 이붕배 참가 어린이 중 거의 탑클래스다. 5단 정도 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진서가 그것보다 더 빠른 게 아닌가? 내가 아니까….”

▲ 2009년 8월 23일 진주시 진주학생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문명근배 전국어린이바둑대회에서 우승하고 아버지와 기념촬영. 부산 개림초등 3학년이었다.

▲ 당시 대회소식을 보도한 지역언론 뉴스사천(https://www.news4000.com)에 실린 결승전 사진이다. 체육관 바닥에 앉아 대국하는 모습이 새롭다. 왼쪽이 흑을 쥔 신진서 어린이. 결승상대는 박진영(진주봉곡초등 4년) 어린이였다. 의자에 앉아 대국을 지켜보고 있는 프로기사 박진열 심판장도 보인다.

아들의 기재를 알아봤을 때, 아버지는 딴세상 사람 같은 행동이 절로 나왔다

- 아버지로서 어떤 촉이 왔군요.

“맞아요. 이게 뭔가? 혹시 이런 인연이 나한테 있나? 하면서 기분이 좀 뜬 상태에서 술도 자주 마시게 되는 그런…. 믿지 못할 상태가 나한테 오니까 조금 붕 떠있는 그런 상태.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에 보거나 평상시에 내 생활에서 조금 벗어난 걸 목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계엄령 선포를 맞닥뜨렸을 때 이상한 기분, 뭔가 딴세상인 양 느껴지듯. 평상시 생각하고는 조금 다른 행동이 그냥 나오더라고요. 갑자기 새벽 3시에 잠이 깨진다든가 그때 술 한잔 한다던가.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새벽 3시에 일어나 술을 마시거나 그러진 않았거든요.”

아버지의 촉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머니 송윤옥 씨는 승천하는 용꿈을 꾸고 낳은 자식이다. 신진서 九단은 2000년 용띠 생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렴풋이, 아득하게나마 늘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 계시를 받은 것 같은 일종의 그런 상태가 딱 왔다는 말씀이네요? ^^ 구체적으로 아들의 어떤 면을 보고 감을 잡으셨나요?

“애 성장속도 그걸 보면서, 또 문제를 풀어내는 이런 감각…. 수많은 애들을 가르쳤던 선생님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보통의 애들은 사활문제를 풀 때 포인트를 저쪽에서 찾아야 되는데 이쪽에서 막 헤매고 있고 그러는데 진서 같은 경우는 포인트를 정답 주변에 두고 거기서부터 답을 찾거든. 너 왜 거기서 생각을 먼저 시작했냐? 이렇게 물어보면 ‘이거 두 수를 놔도 달리 답이 안 보이는데 두 수를 놔도 답이 없는 거에서 내가 찾을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답 주변에서 헤매더라고요.

일곱 살부터 아홉 살까지 날마다 저녁마다 사활을 가르쳤어요. <천룡도> 또 <현현기경> <기경 중묘> 그런 책들이 두껍잖아요. 쌓아놓으면 이만큼 되거든. 그걸 한꺼번에 다 사서 그 중에 좀 쉬운 <현현기경>부터 시작해 마지막 <발양론>까지 마쳤는데 2년 걸리더라고.”

- 그걸 그 어린아이가 따라와요?

“자기가 했지(풀었지). 나는 시간날 때 답을 미리 쭉 보고 변화도를 몇 개 찾아놔야 했어요. 잘 푸는지 못 푸는지를 봐야 되니까 나도 좀 힘들어. 외워놔야 하니까. 채점하는 게 더 힘들어요. 내가 모르면 아예 공부를 못하는 거니. (웃음)

저녁 8시부터 3시간여 문제 풀고 11시에는 아이를 재워야 되는데, 사활이 안 풀리면 ‘야, 됐다. 자자!’ 이게 아니고 문제가 풀려야 아이나 나나 잠을 자니까. 11시를 넘겨 자정에 가까워지면 내일 학교를 보낼 생각에 조급증이 나는 거야. 그러면 아이는 또 아비의 이런 짜증, 신경질을 받아들여야 돼. 그 부분이 엄청나게 힘들더라고. 가끔 12시가 넘게 되면 거의 포기 상태에서 ‘내일 학교 늦게 가면 되지’ 이래 맘을 먹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 전화하곤 했어요. 잠은 반드시 8시간 이상 재웠거든요. 성장기에는 잠이 보약이니까. 그건 기본이니까.”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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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天亂流|2025-05-03 오전 11:26:00|동감 1
동감 댓글
신진서 9단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창호 9단의 아버님도 떠오르네요. 요번의 영화 승부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TV프로그램된 91년 방영 MBC 인간시대에서 이창호 9단 바둑 끝나기를 기다리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어느 분야든 1인자의 비애는 존재하기에 잘 버티고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922alpha|2025-05-03 오전 8:20:00|동감 1
동감 댓글
경상남도의 국립대는 경상대학교 이다.
다른 8도의 국립대들이 대부분 해당 도명에 대학교를 붙인 이름을 갖고 있는데, 경상대는 사립대학인 경남대에 도명을 빼앗겼다.
박가 닭깍귀 맞아요 시절 무소불위에 가까운 힘을 가진 경호실장 박 모씨가 경남..이란 이름을 몹씨 탐을 냈기에, 경상남도의 국립대는 경남대가 되지 몬하고 경상대..라는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창립비화를 들었던 적이 있다.

또한 경북대와 경상대가 같은 격을 가진 국립대학인데, 일부 인사들이 경북대를 경대..라고 하며 북..자를 빼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전남대학과 전북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부 전남도민들이 전대..라고 하며 남..자를 빼고 말하는 것도 횡포이므로 시정해야 할 것이다.
다만 충남대와 충북대는 충남도민과 충북도민들이 서로 그렇게 하지 않으니 존경할만 하다.
경북도민과 전남도민은 이를 참조하면 좋을 것임.

허허, 신공지능의 부친께서 경남의 명문 국립대인 경상대에 두 번이나 연이어 합격했던 인물임을 알고, 흥분이 되었는지 횡설수설 늘어놓고 말았군요. 제현들의 해량을..

신공지능이 있게 된 것은 뛰어난 아버지의 지능을 물려받은 때문이 아닌가싶고, 짐작에는 어머니 되시는 분의 지능 또한 그러리라 여겨짐.
신공지능 사범은 오래도록 대한국의 위명을 전세계 만방에 떨쳐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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