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선수가 그러하듯 신진서 九단 또한 아버지의 존재를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신진서를 만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가르치고(敎) 길렀을까(育).
이 글은 [월간바둑] 2025년 1월호부터 3월호에 걸쳐 실은 '신진서 九단의 아버지 신상용 씨' 특별인터뷰를 5월 황금연휴를 맞아 다시 소개하는 것입니다. 본문 중 언급하는 기록과 일시는 원고 게재 당시 기준 그대로 전재했음을 밝힙니다. 신진서 九단의 어릴 적 자료사진은 신상용 씨로부터 제공받은 것입니다. 매달 25일에 발행하는 [월간바둑]에도 관심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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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공지능’을 만든 아버지 신상용 씨 특별인터뷰 ② 아버지는 아들의 바둑을 보면 안다! ☜ 2편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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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공지능’을 만든 아버지 신상용 씨 특별인터뷰 ⑤ “엉망진창인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가 차라리 나아요.” ☜ 4편 보기 클릭
▲ 그 아버지에 그 아들.
2020년 11월 신진서 九단에겐 명실공히 '세계최강 등극'을 선언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커제 九단과 정면대결을 펼치게 됐기 때문이다. 이미 같은 해 2월 박정환 九단을 꺾고 LG배에서 우승한 그였기에, 커제마저 물리치면 당시 세계바둑 3대 천왕으로 불리던 3명 중 2명을 결승에서 꺾고 세계바둑 일인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메이저 세계대회 2관왕을 향해 결연한 의지로 출정한 그 대회에서, 인터넷바둑으로 성장한 신진서가, ‘신공지능’ 소리를 듣는 그가 마우스 미스로 통한의 눈물을 흘릴 줄 누가 알았을까. 누구보다도 승부근성이 강한 신진서는 그해를 보내며 “2021년엔 세계대회에서 한판도 지지 않겠다”는 독한 목표를 세웠다. 그해 11월 1일까지 실제 세계대회 16연승을 거뒀고, 세계대회 전적 19승 3패로 한해를 마무리한 바 있다.
특별인터뷰 최종편은 워낙 '임팩트' 컸던 그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번외편처럼 마무리할까 한다.
마우스 미스, 그 사건
“엉망진창인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가 차라리 나아요.”
스물넷 나이의 신진서 九단이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의 배경에는 2020년 11월 2일 삼성화재배 결승1국에서 발생한 ‘마우스 미스’ 사고가 있다. 역시 바둑사에 기록될만한 사건이다. 당시 코로나 탓에 한국과 중국 간 온라인 비대면 인터넷대국으로 두었다. 이 대결에서 흑을 든 신진서 九단이 21번째 수를 1선에 두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 바둑사에 기록될 문제의 마우스 미스 그 장면. 흑21번째 수가 1선에 두어졌다. 공식대회 결승에서 처음 나온 마우스 미스다.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마우스 미스였다. 초반 포석단계에서 1선 착점은 한수 포기한 거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실수. AI는 10집 손해로 계산했다. 정상급 프로에게 초반에 이 정도 격차는 거의 사망선고와 같다.
▲ 괴로워하는 신진서. (사진/ 바둑TV 유튜브 캡처)
가장 놀란 사람은 신진서 九단이었다. 일시 대국이 중단됐다. 잠깐 어리둥절해하던 그는 한국기원 담당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자신의 마우스 미스를 받아들였다. 대국이 중단된 시간은 정확히 3분 20초에 불과했고, 커제 九단의 백22가 뒤이어 놓이면서 경기가 속개됐다. 신진서 九단은 이 바둑을 허망하게 졌다. 1선 착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120수 만에 돌을 거뒀다.
대국자의 실수도, 소프트웨어나 기계적인 결함도 아니었다. 문제는 세심하게 세팅하지 못한 대국장 환경 탓이었다. 중국처럼 가로가 긴 바둑테이블을 놓고 실제 인터넷 대국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는 노트북과 신진서 九단이 들여다보는(바둑판이 띄워진) 대형 모니터와의 간격을 여유 있게 벌려 놓았던들 이러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노트북과 모니터를 바짝 붙여놓은 바람에 노트북에서 USB로 연결된 마우스 케이블이 노트북의 터치패드를 건드려 벌어진 사달이었다.
마우스 케이블이 중간지점에 위치한 노트북의 터치패드에 닿게 세팅된 게 문제였다. 아니면 사전에 터치패드 마우스 기능을 잠금으로 설정해 놓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때만해도 한국기원의 기전 진행요원이 온라인대국으로 세계대회를 치른 경험이 없다 보니 미처 헤아리지 못한 체크 포인트였다.
▲ 마우스 미스 사고가 났을 때의 대국장 세팅. 마우스 케이블이 노트북 터치패드에 걸쳐 있다.
▲ 다음판(결승2국)에서는 옆 노트북의 마우스 패드를 잠금장치 하고 아예 커버를 덮어버려 우발적인 사고에 대비했다. 신진서 九단의 처지에선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다.
당시 대국은 사이버오로 인터넷 대국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기에 필자는 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관전하던 팬들에게 사이버오로만 애꿎게 욕을 먹었다. 억울했다. 하물며 신진서 九단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왜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 패배를 자초했을까. 두고 두고 궁금했던 대목이었기에 아버지를 만나면 그때 심정을 꼭 물어보고 싶었다.
▲ 마우스 미스 때 심판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게 아쉬웠다고 아버지 신상용 씨는 말했다.
- 지난 일이긴 합니다만 그때 아버지 심정은 어땠습니까? 마우스 미스 사고가 아니었던들 좀더 빨리 커제를 넘어설 수 있었을 텐데요. 승부란 게 기세이고 자신감인데…, 그 호기를 낭비한 듯해 많은 사람이 분통을 터뜨리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때 대국을 딱 스톱시키고 심판이 내막을 알아봤어야 되는데 그게 안된 게 문제였지요. 인터넷으로 두는 대국이야 어떤 돌발상황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쳐도…. 그런데 이번에(2024년 11월 15일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커제의 백돌통에 흑돌이 하나 섞여 있었던 거, 사실 그런 경우를 보기가 더 힘들거든요. 하마터면 문제가 될 뻔했어요. 실제 대국 중 커제가 흑돌이 나오자 진서 돌통에 넣어주지 않고 무심결 자기 돌뚜껑에 올려놓았거든요. 이러면 사석이 될 수 있잖아요.
이를 발견한 심판이 개입해 잠시 대국을 중단시키고 조처를 하긴 했지만 그때가 또 서로 초읽기 상황이었거든요. 초반부터 형세가 크게 불리했던 진서가 힘겹게 뒷심을 발휘해 반집을 이기느냐 마느냐 대역전극을 펼치는 장면이었잖아요. 이러한 흐름에서 호흡이 중단되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어요. 아슬아슬하게 반집 이겨서 넘어가긴 했지만 사실 그때 무척 조마조마했지요.”
세팅 부주의로 당한 사고라는 걸 당시 신진서 九단도 눈치 채고 있었던 듯하다. 인터넷망을 통해 원거리 온라인으로 벌이는 대국은 이처럼 예기치 않은 돌발변수가 상존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이의제기 버튼]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신진서 九단은 이러한 변수 또한 자신의 불찰로 받아들여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대국에 임했다. 준우승에 그친 뒤 시상식장에서 한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마우스 미스일 확률은 없었다. 바둑판을 띄운 큰 모니터가 옆의 노트북과 연결돼 있으니까 노트북에서 길게 끌고 나온 마우스 케이블이 터치패드를 건드려 벌어진 일”이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터치패드에 케이블이 끌린다는 사실을 빨리 알았어야 하는데 실수하고 나서 알게 됐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고, 바둑을 두는 선수나 대회를 개최하는 한국기원이 (더) 신경 써야할 것 같다”는 말만 덧붙였다.
매우 억울했을 법한 피해를 입고서도 이를 들춰 항의하기보다는,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갖기보다는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달라는 바람을 앞세우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어 [이의제기 버튼]을 눌러서 어필할 기회가 있었는데 왜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일단 충격이기도 했고…. 마우스 미스가 결국은 실수인 부분이 있으니까…”라며 “사실 (이의제기 버튼 누르기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속내를 밝혔다.
굉장히 억울하긴 하나 이 역시 한판의 바둑, 이것도 승부의 일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오히려 팬들에게 미안해하고 더 분발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승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32강부터 임했는데 좀 안 좋은 결과를 보여드린 것 같아서 죄송하고 많이 힘든 상황인데…, 앞으로 좀 더 많은 부분에서 노력해야 할 것 같다.”
▲ 무릎에 앉혀 예뻐했던 아이가…
▲ 아빠의 기타 소리를 들으며 자란 이 아이가 훗날 세계바둑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될 줄 알았을까.
▲ 신진서 九단이 2025년 2월 28일 싱가포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열린 제1회 난양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3번기 제2국에서 중국랭킹 6위 왕싱하오(21) 9단에게 227수 만에 흑으로 불계승,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이번 우승으로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8회를 기록했다.
▲ 2020년 LG배 우승을 시작으로 5년간 8회 세계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린 신진서 九단은 이창호(17회) > 이세돌(14회) > 조훈현(9회)에 이어 구리(8회), 커제(8회)와 동률을 이뤘다. 과연 이세돌, 이창호의 기록을 뛰어넘을 것인지도 관심사다.
아름답게 지는 법, 그 역시 승부의 중요한 가치다
이러한 태도는 4년 뒤 낸 자서전에서도 볼 수 있다.
“초반이었지만 너무 치명적인 착점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이 어려워 패하고 말았지만 결론은 내 과실이었다”고 싹싹하게 인정하면서, 정작 그 다음판(결승2국)에서 프로로서 멘탈을 잡지 못한 채 역전 반집패를 당하고 만 자신을 더 자책했다.
프로기사의 세계에서는 승리만큼이나 패배도 중요하다. 모든 경기에 이기는 사람은 없다. 패배는 반드시 마주할 현실이고, 그것을 어떻게 딛고 다시 승리로 나아가는지에 따라 그의 경력이 결정된다. (중략)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듯이 나는 승리만큼이나 패배를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기에 자주 멘탈이 흔들렸다. 패배란 실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존재가 아닌가. 승리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부족한데 패배까지 대비해야 한다니! 하지만 패배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다. - 신진서 저, <대국>에서.
언론에서는 신진서 九단의 삼성화재배 결승1국 패배를 ‘1억원짜리 마우스 미스’라고 썼다. 우승상금 3억원짜리 결승3번기였으니 산술적 판당 가치가 1억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진서 九단은 자서전에서 말하길, 마우스 미스로 잃은 그 판보다는 정작 반집 패배를 당한 2국에 대해 아쉬워했다. 결승1국을 허무하게 잃어 멘탈이 흔들릴 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를 털어버리고 중반에 우세를 확립한 바둑이었기 때문이다.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천신만고 끝에 1대1 동률을 이뤘으니 최종 단판승부 기회를 얻었다 싶었다. 이런 잡념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하필이면 그 무렵 중국과의 인터넷 국제망이 불안정해서인지 대국실 접속이 끊어지는 현상이 몇 번 발발하면서 집중력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를 핑계 삼을 순 없다. 상대의 날카로운 반격에 흔들리기 시작했고 많이 우세했던 바둑이 알 수 없는 국면이 되자 평정심을 잃었다. 이에 비해 커제 九단은 반집을 다투는 형세에서도 끝까지 냉정하고 침착했다.
결국 319수에 이르는 접전 끝에 딱 반집을 졌다. 신진서 九단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때의 시련과 깨달음이 나를 강하게 키웠다”고 회고했다. 승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했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 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존재가 승부사란 걸 새삼 깨달았다. 이후 신진서 九단은 지금까지 커제 九단을 상대로 10연승을 거두며 압도하고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를 빛낸 전설적인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은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스포츠에서도 갈채는 승자에게만 쏟아지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신진서를 위대하다 말하는 건 단지 일인자여서만이 아니다. 패배를 받아들일 줄 아는 승부사이자 무엇보다 일인자의 무게와 책무를 아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인자를 만난다는 건 행운이고, 이러한 일인자를 보유한 한국바둑과 팬은 행복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