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

▲ 메이저 세계대회 역사에서 여자기사로서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한 최정 9단. 2022 삼성화재배 결승에 올라 신진서 9단과 맞대결을 한 뒤 준우승 했다.

한국바둑팬들은, 아니 한국 바둑은 들뜨고 행복한 마음으로 잠을 설쳤다.
인간 바둑계를 벗어나 저 높이 올라가는 듯한 최강의 기사 신진서 9단이 메이저 세계대회 삼성화재배에서 2전3기로 우승했다.

실력은 진즉 인정받고 있었으나 세계대회 정상을 점령할 때마다 바둑팬들은 ‘자랑스런 한국바둑의 최고봉 신진서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고’라는 확신을 점차 더 굳히고 있었는데, 미답이었던 삼성화재배까지 정복하자 과연 신진서는 천의무봉의 무공을 지녔음이 틀림없다고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한국기사들이 보여준 모습이 함께 든든했다. 16강을 치른 결과 한국 7명이 승리한 것이다. 김지석이 대만 일인자 쉬하오홍을 꺾었고 김명훈이 응씨배 선수권자 탕웨이싱을 꺾었으며 신진서가 까다로운 중국 강호 판팅위를 이겼고 박정환이 속기의 대가 탄샤오를 꺾었다. 최정이 일본 강자 이치리키 료를, 변상일이 중국 2위 구쯔하오를, 이형진이 일본의 샛별 나카무라 스미레를 제압했다. 나머지 한 자리를 유일하게 중국의 양딩신(자국랭킹 5위)이 차지했다.

▲ 한국바둑의 매운맛을 세계에 보여준 한국선수들.

▲ 삼성화재배 결승에 3번째 오른 뒤 첫 우승을 해낸 신진서.

1996년 출범해 27년간 개최된 삼성화재배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한국 바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양딩신마저 가만두지 않았고 4강도 독점했다. 8강의 유일한 한중전이었던 최정-양딩신 전에서 최정이 예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양딩신을 물리쳤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국은 경사가 났고 중국 바둑팬들은 분노했다. 중국팬들은 “중국 바둑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국가대표팀은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치욕이다. 중국바둑에 흑역사가 시작됐다. 우리는 다른 나라 경기만 봐야 할 것.”이라는 등 위기감을 느끼는 반응을 보였다.

오랜 기간 한국이 우승을 차지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소수가 남아 진군하던 것과는 달리 한국 선수들은 허리층부터 결집해 두터운 ‘만리장성’을 깔끔하게 몰아냈고 AI의 등장 이래 무섭게 부활하고 있는 일본을 꼼짝못하게 했으며 다크호스였던 대만은 자취를 감추도록 했다.

감동의 도가니었던 이번 2022의 삼성화재배의 결과는 모두가 잘 안다. 하지만 이 경사 중 여자기사 최정의 활약은 참 인상 깊었기에 되짚어보고 싶다.

‘여자바둑의 한계’라고 하는 집단무의식 속에 내재한 잘못된 믿음을 깨뜨렸다. 30년 전 중국여자기사 루이나이웨이가 세계대회 4강(응씨배)에 진출한 적은 있지만 그 기록조차도 오랜 기간 깨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을 해내는 여자기사가 없었는데 최정이 해낸 것이다.

▲ 한국바둑팬들은 최정을 응원했으나 중국 강호 양딩신까지 꺾으리라고 큰 기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정은 보란 듯이 이겼다. 그러곤 웃으며 대국석에서 일어났다.

이 준우승은 그냥 준우승이 아니다.
입단 때부터 “남자기사들과 대등한 경쟁을하고 싶다.”는 각오를 밝혀온 최정은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을 해내고 있다. 전체 기사가 참가하는 메이저 세계대회에서 한중일의 강호들을 넘고 결승까지 진출하며 얻어낸 성과다.

32강전에서 일본의 복병 사다 아쓰시 7단를 상대하며 돌 19개짜리 대마를 잡았고, 16강전에서 기성타이틀을 보유한 일본의 일인자 이치리키 료 9단를 맞아서는 34개로 이뤄진 대마를 포획했다. 한국랭킹 2위이며 싸움신의 경지에 올라 있는 변상일 9단을 맞이한 4강전에서는 21개로 이뤄진 대마를 잡고 결승에 올랐다.

삼성화재배 본선이 열리기 직전까지 최정은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반상을 누비는 전투의 여신 한 명이 보일 뿐이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류시훈 9단은 “바둑에서 남자기사와 여자기사의 차이는 사라져 가고 있다. 이후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기대된다.”고 했다. 한국 남자기사들 사이에서는 “최정 선수의 기술적인 면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부터 훌륭했다. 이번 삼성화재배에서 돋보였던 건 최고의 기사들을 맞아 흔들림없는 모습을 보여준 정신적 성숙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최정은 “나의 상대들이 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점이 컸을 것이다.”라며 몸을 낮췄다.

▲ 삼성화재배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신진서(오른쪽)와 최정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삼성화재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뒤 최정은 “(기자회견 때) 전혀 울고 싶지 않았는데 순간 울컥했다. 눈물을 참느라 힘들어서 신진서 선수한테 축하한다는 말을 못한 게 아쉬웠다.”고 했다.

한국 바둑국가대표팀 목진석 감독은 “지금과 같은 인공지능 시대에 기술이 뛰어난 기사들은 정말 많아졌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기사는 찾기 힘들다. 최정 9단은 삼성화재배가 끝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한계는 자신이 정한다”고 말했다. 이번 삼성화재배에서 최정은 모든 바둑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고, 전 세계 바둑인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잔뜩 실리를 챙긴 뒤 타개로 승부를 보는 배짱

[그림1] 중국 양딩신과 벌인 2022 삼성화재배 8강전.
초반 감각이 뛰어난 양딩신(백)이 약간이지만 앞서고 있었다. 양딩신이 백1로 달려들어가자 최정이 흑2, 4로 차단의 행마를 했는데 여기서 양딩신이 조금씩 흔들려 갔다.

[그림2] 백1~흑6까지는 당연한 응접이다. (흑세모…따냄)

[그림1]양딩신이 백1로 당장 패를 시작한 게 성급했다. 최정이 흑2로 백세모를 따냈고 양딩신이 3에 두어 팻감을 쓰러 갔다.

[그림3] 패공방이 이어진다. 흑1~3까지. 양딩신이 팻감에서 최정에게 밀린다. (흑세모…따냄)

[그림4] 하는 수 없이 양딩신은 백1로 따내어 패를 해소했다. 하변을 가른 흑2가 커서 최정이 약간 우세해졌다.

[그림5] 수순은 좀더 진행되었고 백1에 최정이 흑2로 우변을 타격해서 배짱 싸움으로 나선 게 결국은 성공했다.

[그림6] 백1~8까지 최정은 우하의 백세모들을 꿀꺽 삼킨 뒤 흑세모를 살리는 데 승부를 걸었다. 우하에서 최정이 벌어놓은 게 커서 좌하 흑을 공격해야 하는 양딩신의 부담도 크다.

[그림7] 초조한 마음이었을까, 양딩신이 중앙 쪽이 아닌 변쪽 백1부터 공격을 시작했는데 최정이 흑2로 두어 날아가자 이 흑이 공격당할 것 같지가 않다.

[그림8] 백1~흑10까지 최정은 중앙 대마 수습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이로써 승부도 여기서 결정됐다.

[그림9] 양딩신으로선 애초에 중앙 패를 걸지 않고 하변 백1 정도로 보강해 놓고선 흑2엔 백3 정도로 두면서 중앙 패를 서서히 진행했다면 여전히 양딩신이 우세한 국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평상심과 함께 정확한 형세판단이 필요한데 양딩신은 바로 그것에 실패했다.

■ 수읽기에 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대담한 플레이

[그림1] 변상일(백)과 벌인 2022 삼성화재배 4강전이다. 중앙에서 변상일의 백 대마가 쫓기고 있는데 변상일은 A 정로 뛰어나가지 않고 기수를 뒤로 돌려 백1로 우변의 흑세모에 위협을 가했다. 쫓기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까다롭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그랬는데 백1은 통한의 한수가 되고 만다. 멀리 내다본 최정이 이를 정확하게 응징했고 결국 백 대마를 삼키며 바둑을 끝냈기 때문이다.

[그림2] 흑1이 최정의 날카로운 반격. 백이 A로 받는다면 흑은 엄청난 실리 손해를 본다. 이를 감수하면서도 우변 흑의 안위를 보장해 놓고 중앙 백을 공격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이는 정확했다. 하지만 실리 손해가 워낙 크기에 웬만한 확신이 아니고서는 결행하기 어려운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