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집은 하늘의 뜻일지라도, 끝까지 투혼을 보여준 당신은 우리의 영웅

영웅은 하늘이 만든다
마침내 농심배가 막을 내렸다. 비록 최종국에서 커제에게 반집패함으로써 우승은 놓쳤지만 5명의 적장을 앞에 두고 홀로 출전한 박정환의 모습이 어쩌면 예전 이창호의 5관대첩과 그리 닮았나!

야구선수가 꿈에도 그리는 장면이 있다. 한 점차로 앞선 승부에서 상황은 노아웃 만루!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투입된 마무리투수의 꿈은 뭘까? 세 타자를 3구삼진으로 아웃시켜 승부를 마무리 짓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투수의 꿈이다. 타자는? 3점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공격. 상황은 2아웃, 그런데 잔루 만루! 여기서 만루 홈런으로 승부를 뒤집는 것. 이것이 타자의 꿈이다. 이때 투수와 타자는 영웅이 된다. 이런 상황은 선수 개인의 능력과는 큰 관계가 없다. 바로 그런 상황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웅은 인간 스스로 될 수 없다. 하늘이 만들어 주어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창호가 영웅이 된 ‘샹하이 대첩’이 이창호의 의지로 된 것인가? 아니다. 하늘이 만들어 준 것이다. 앞에 내세운 네 명의 장수가 다 낙마하고 홀로 남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커제와의 마지막 한판을 앞둔 박정환을 보며 “영웅은 하늘이 만든다”는 말이 뼈저렸다. 1:5의 열세에서, 그것도 중국의 4명이 모두 한국기사에게 껄끄러운 존재일 뿐 아니라 세계타이틀을 맛본 기사들임을 헤아릴 때 솔직히 박정환이 장비처럼 조조의 십만 군사를 호통 하나로 물리 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있었겠나?

게다가 판팅위와의 재대국! 그에 이은 세얼하오와의 더블헤더라니!

혼잣생각이겠지만, 판팅위는 박정환의 마우스 버그를 알았을 때 패배를 시인 할 수 없었나? 셰얼하오는 판팅위가 재차 지는 모습을 본 다음, 대국을 기권하고 “하루 쉬어 컨디션을 조절한 다음 우리 중국의 최강 커제와 건곤일착의 명승부를 기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기권할 수는 없었나? 판팅위는 두번 지고, 셰얼하오는 지친 적장을 상대로 패배했을 때 커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지면 천하의 망신이요 이기면 지친 상대를 상대로 어부지리를 얻었다 할 테니, 커제는 무슨 죈가?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상대를 이겼을 때 차이가 난다. 몽테뉴가 말했다. 강한 자는 상대가 쓰러지면 더는 공격하지 않는다고. 왜? 일어나 다시 도전하더라도 이길 수 있으니까! 반면에 약한 자는 상대가 행여 쓰러지면 두번 다시 일어날 수 없게 짓밟는다. 왜? 다시 도전하면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이것이 진정한 강자와 약자의 차이다.

그러면 케제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당연히 강자다. 그런데 어찌해도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지면 치욕, 이기면 본전, 승부사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마지막 무대에 오른 커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최종국에 임한 두 사람은 과연 당대 최고의 기사들이었다. 미묘하게 반전을 거듭하던 승부의 저울추가 마침내 커제의 반집승으로 기울었지만 박정환의 필사적인 추격과 커제의 혼신의 힘을 다한 뿌리침은 바둑이라는 게임이 보여 줄 수 있는 드라마의 극치를 연출했다.

반집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만든 가장 재미있는 게임은 체스지만 바둑은 신이 만든 게임이라고 말한다. 그 신의 유희에 최후의 두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른 박정환과 커제. 두 기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커제, 당신은 최고의 기사임을 보여주었지만 박정환은 영웅이었다. 당신에게 그 영웅의 자리를 준 하늘에 감사하자. 잘 싸웠다. 박정환, 당신은 우리 바둑팬의 영웅이다.





오현세 / 작가
한국 현대바둑 70주년기념 바둑문학상 공모전에서 <인간 발전의 가늠자 바둑>이란 작품으로 수필부문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