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명지대학교 총장님, 그리고 학교 법인 관계자 여러분 저는 오늘 명지대학교의 바둑학과 폐지 예정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요 몇 년 사이 일련의 재정 문제로 명지대학교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회생을 위해서 학교 측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도 다 압니다. 그러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명지대학교의 바둑학과 폐지 조처는 중대한 실수임이 분명하기에 저는 900만 바둑인을 대표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하는 바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바둑학과 폐과의 논거

제가 바둑학과 폐지를 명지대학교의 큰 실수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학교 측이 내세운 학과 폐지에 대한 이유가 전혀 공감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 측은 바둑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었다는 것, 바둑학과 신입생을 보면 한국바둑고등학교 졸업생의 진학 비율이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바둑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었다는 근거로 바둑 인구가 26%에서 23%로 감소했고, 특히 젊은 층의 감소(20∼35세 인구 중 바둑 인구는 9%)가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유를 보면서 그야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요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느낍니다. 한국바둑고등학교 졸업생의 바둑학과 진학율이 높아서 학과를 폐지한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설명에서 제외하고 바둑이 사양산업이라는 부분에 관해서만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바둑이 사양산업임을 내세우는 관계자에게 도대체 교육이란 게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더 좁혀 말하면 교육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하는지 과거지향적이어야 하는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제8대 대한바둑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 여부를 고민할 당시 학교 측이 제시하는 바둑 인구의 감소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현실이 그러하니 오히려 출마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할 일이 분명하다고 역발상한 것입니다. 바둑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를 돌려세워서 바둑 인구를 두 배, 세 배로 늘리자, 이것이 나의 할 일이다, 그렇게 미래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대상을 우리나라를 넘어서 전 세계로 확산하자,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회장이 된 이후 그런 날을 꿈꾸며 국내 홍보는 물론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서 전(全) 세계 청소년 바둑대회를 뉴욕에서 개최하는 안을 확정하는 등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생업에 쫓기는 일개 필부인 저도 이러하거늘 명지대학교는 어디를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또 명지대학교가 주장하는 사양산업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저는 사양 사업을 ‘이제는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산업이라 결국에 소멸할 분야’라고 봅니다. 바둑이 과연 그러합니까?



바둑은 오히려 세계에 내세워야할 한국의 자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현재의 추세가 26%에서 23%로 감소했다고 하지만 바둑은 잠재력이 있는 산업이며 가치 있는 산업이지 절대 사양산업이 아닙니다. 바둑을 전심전력 육성해야 할 근거로 댈 사유는 너무나 많지만 지면 관계상 가장 중요한 점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바둑이 현대 문명의 부작용이라는 바이러스를 치유할 훌륭한 백신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수많은 변형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습니다. 저 멀리는 중세 시대의 흑사병에서부터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가 다 바이러스에 의한 것입니다. 코로나가 처음 번져나갈 때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이 놀랐습니까? 언제 또 어떤 바이러스가 우리를 엄습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신종 바이러스가 나오면 그에 맞는 백신을 개발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보다도 더 위험한 바이러스가 지금 우리 곁에서 몸집을 불리고 있는 데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바이러스로 인한 문제가 불거질 때만 잠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 뿐입니다. 그 바이러스는 ‘현대 문명의 부작용’입니다.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오그번(William Ogburn)은 물질문명의 발달 속도를 비(非) 물질문명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을 ’문화 지체(Cultural Lag)’라 불렀습니다. 그의 지적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시점을 사는 우리는 여러 가지 문화 지체 현상을 절절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만 전 세계 인류 공통의 관점으로 눈을 돌려보면 현대 사회는 지나친 편리함과 빠른 속도에 젖어 있습니다. IT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그야말로 ‘더 빨리 더 편리하게’가 매일 업그레이드되는 결과 어른이고 아이고 가장 많이 접하고 익히는 것이 전자기기이며 이런 기술들은 속도를 그 생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무한 진화 중인 컴퓨터게임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가장 빨리 가장 많이 죽이고 파괴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어느새 속도를 생명으로 삼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인명 경시 현상마저 생겼습니다. 즉 기다릴 줄을 모르며 참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층간 소음 문제가 생기면 몇 번 다투다가 결국 찾아가서 사람을 먼저 찌르고 봅니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은 해가 갈수록 더욱 빈번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돌이키기도 싫은 N번방 사건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미쳐 날뛰듯 이렇게 팽팽 돌아가는 이 사회의 병폐–현대문명의 부작용이라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치유하면 좋을까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백신이 필요하듯이 현대문명의 부작용이라는 바이러스에도 백신이 필요하며 그 백신은 바로 바둑입니다.



바둑이 현대 문명병의 백신이 되는 이유는 바둑의 특성 때문입니다.
일단 바둑은 기다림을 기본으로 합니다. 아무리 내가 조급증을 내도 상대가 둘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바둑의 룰입니다.

프로들의 바둑에서는 몇 십 분을 앉아서 상대가 둘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왜 그 긴 시간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상대가 둘 때까지 기다려 줄까요? ‘속도’라는 현대 문명병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면 열 번도 더 판을 뒤엎었을 텐데 바둑기사들은 왜 그 긴 시간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상대가 둘 때까지 기다려 줄까요?

그것은 바둑이 지니는 기회의 균등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그 긴 시간은 나에게도 똑같이 수를 생각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인 동시에 나도 위기에 처하면 상대방처럼 길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팽팽 돌아가는 세상에 기다림이 오히려 미학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둑입니다.

그리고 바둑에는 상생(相生)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바둑의 정석(定石)은 나만 이기는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흑이든 백이든 서로가 택하는 최선의 수를 정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둑에는 언제든지 다음 기회가 있습니다. 즉 이번에 졌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다음 판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둑은 어찌 보면 치열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는 조급성과 폭력이 난무하지 않으므로 소리가 없고 기다리며 배려하는 가운데 합리와 논리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을 후세 아이들에게 경험하고 체득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 인류의 공통 과제입니다.

회장으로 당선된 이후에 가장 먼저 미국을 찾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학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바둑을 보급하여 그들 스스로 기다림과 상생의 미덕을 깨닫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은 젊은이들의 의식을 바꿔주는 길이며 그 방법은 바로 바둑입니다.

우리가 바둑을 육성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어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백세시대로 가자는 건강 장수를 목표로 해왔으나 어느새 그 백세시대는 눈앞에 다가와서 대한민국은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초고령화 사회란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전체 20% 이상인 사회를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2020년 기준 전국 시군구 10곳 중 4곳은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습니다. 현 추세대로라면 2025년 한국 전체가 초고령 사회에 들어서며, 이는 2018년 고령사회에 접어든 후 불과 7년 만에 초고령 사회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오는 2030년에는 치매 환자가 136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며, 치매로 인한 사회 경제적 부담도 늘어 2019년 기준 치매로 인한 1인당 연간 의료비는 298만 원이며, 장기요양비용은 약 1,400만 원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노인 치매 문제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전 예방인데, 사전 예방의 가장 좋은 방법은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두뇌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 해결의 핵심은 두뇌 활동을 어떻게 자극할 것인가인데 바둑은 이에 관한 최상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바둑이 좋은 점은 두뇌 활동뿐만 아니라 행복한 노년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너무 편리함과 속도에 젖어 있으며 모든 걸 이기고 지는 승부로 삼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일평생 가족을 위해 속도와 승부 전쟁에 고생해온 분들이 노년마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만들면 그 스트레스로 노년은 불행한 시기가 되어버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바둑에는 언제든지 다음 기회가 있습니다. 즉 좌변에서 망했다고 끝난 게 아니라 우변에 기대를 걸 수 있으며 이번에 졌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다음 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놀 아래 승패를 떠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내일의 다른 한판을 기약하며 웃는 얼굴로 헤어지는 노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인들이 행복하게 살다가 평안한 삶을 마감해야 진정한 복지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 국민 나아가 전 인류에게 바둑을 보급하고 육성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둑을 육성하고 보급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 구차한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고 봅니다. 바둑은 이미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한국은 당시 3개의 금메달을 거머쥐었지만 곧이어 올림픽위원회의 아시안게임 7개 종목 축소 요청에 따라 바둑이 정식종목에서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두뇌 스포츠의 중요성과 세계로 번져가는 바둑의 보급 추세를 무시할 수 없는지라 결국 올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통한의 코로나 사태 탓에 아시안게임이 1년 연기됨으로써 선수들은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아시안게임 다음으로 바둑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올림픽입니다. 바둑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은 우리 협회의 최종 목표이기도 합니다.

위기에 처한 명지대가 오히려 ‘바둑학과’를 전면에 내세워야할 이유

바둑이 아시안게임에서 부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명지대학교의 주장처럼 사양산업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즐기는 젊은이들이 적어서 그럴까요?
각설하고 바둑이 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지 바둑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바둑이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우리나라가 메달을 쓸어오는 날이 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모르긴 해도 바둑 관계인이라면 누구나 ‘나는 그럴 줄 알았다. 당연한 일이지.’라고 자화자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런 빈말이 아니라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힘쓰고 그 이후를 미리 준비하는 일입니다. 명지대학교 바둑학과는 그런 면에서 많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바둑에 대한 학문적 이론의 정립과 지도자 양성, 특히 외국 유학생들을 받아들여 바둑의 세계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유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바둑학과가 아니었다면 명지대학교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특히 중국 유학생이 상당히 많은 수를 차지하는데 바둑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중국이 왜 명지대에 유학을 보낼까요? 그것은 아무리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아도 명지대처럼 바둑학과를 운영할 노하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공학과 하나를 개설하려면 그에 따르는 교수진의 확보와 특화된 교육과정이 필수인데 바둑이 특수 분야라 이게 힘든 겁니다. 그런데 명지대학교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지금은 그 위에 25년간 쌓아온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더욱 심오한 노하우를 축적했습니다. 한마디로 명지대학교 바둑학과는 세계 바둑의 역사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불후의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최악의 선택인 폐과 결정을 합니까? 최근에 한국을 다녀간 빈 살만 사우디 왕자가 화제가 되었었지요. 바로 그 사우디는 몇 년 전부터 한국의 바둑 고수를 영입하면서 바둑 인구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요르단과 아랍에미리트 등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들은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몰라서 그러고 있을까요?

유럽은 바둑에 아예 문외한이었지만 역시 늦게 눈을 떴으며 여러 대회가 있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알파고와 첫 대결을 벌였던 기사 판 후이가 2013~2015년 연이어 우승한 유럽바둑챔피언십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실력은 부족하지만 어쨌든 바둑 인구는 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명지대학교 통합추진위원회 위원님들께 다시 한번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학교 측이 내세우는 바둑학과 폐과 사유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바둑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바둑 역사의 영웅에서 갑자기 몸을 던져 추락사하려 하십니까? 어려운 속사정이 있다면 바둑인 모두에게 호소하여 그 문제의 구제에 같이 힘쓸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런 민족이니까요.

부디 현명한 판단으로 바둑학과 폐지 결정을 철회하시어 온 국민과 역사 앞에 떳떳한 주인공이 되시기를 간구합니다.

- 간절한 바람으로, 대한바둑협회 회장 서효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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